아프리카의 대기근


















   아프리카 대륙에 나타난 대량 아사의 유령

 죽어가는 아이의 움푹 들어간 눈, 고통을 넘어선 절망적 표정의 어머니, 그것은 비극의 이미지다. 그들과 그들 주변의 굶어죽어 가고 있는 군상들은 이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으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큰재앙에 대한 증인이 되고 있다.

 대서양 연안의 세네갈에서부터 홍해에 접한 에티오피아까지, 아프리카 대륙을 동서로 가로질러 장장 4800km 이상 뻗어 있는 사하라 남쪽의 어느 나라에서도 바로 그 얼굴들을 볼 수 잇다. 이 지역은 아랍말로  해변 을 뜻하는  서힐(사하라사막 남쪽에 면한 광범위한 건조지대. 세네갈에서 차드까지 9개 나라가 포함돼 있다)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에 포괄되는 지역의 크기는 약 620만 평방 킬로미터이다. 말리, 모리타니아, 부르키나파소, 니제르공화국, 차드, 수단 등 귀에 다소 생소한 국가들이 포함돼 있는 여기가 바로 80년대 중반, 금세기 최악의 자연 재해 가운데 하나로서, 가뭄과 흉작이 오랜 세월 동안 심상치 않게 반복되어 그 폐해가 절정에 달했던 지역이다.

 황폐화 과정은 서서히, 무자비하게 진행되었다. 서힐 사람들은 거칠지만 그런 대로 쓸만한 이 땅에서 대를 이러 살아왔다. 이 지역은 인구가 그다지 과밀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계 최대의 사막(사하라사막)과 접경한 이 반건조 기후지대에서 오랫동안 그럭저럭 살아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원에서 목축을 하거나 작물을 경작함으로써 삶을 유지했다. 목축과 경작은 6월부터 9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내리는 계절적 비에 크게 의존돼 있었다.

 전통적인 생활도 결코 쉽지는 않았으며, 높은 유아 사망률이 인구를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대가족이 장려된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노동력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훗날 나이든 부모를 부양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때맞춰 의료기술, 위생 등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평균 수명이 상승했다. 그러나 서힐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 자식을 낳았다. 그 결과, 이 지역의 인구는 엄청나게 증가했고, 마찬가지의 엄청난 압박이 토지에 가해졌다. 철따라 이동하는 소와 염소떼를 먹여 살리기에도 벅찬 초원을 경작하기 위해 쟁기로 일구는 바람에 초원지대의 귀중한 표토가 침식작용에 더한층 취약해졌다. 게다가 매일 수천 개의 부락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땔나무를 훑어가면서 토양을 보호해 주는 수목들이 전지역에서 씨가 말라갔다.

 여기에 가뭄이 겹쳐 문제를 대재앙의 차원으로 바꿔놓았다. 1968년 5년 이상 가뭄이 계속되면서 가축이 몰사했고 흉년이 들었다.

1970년대초까지, 굶주림으로 숨진 사람이 25만명, 가축의 손실은 무려 350만 마리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1974년 이후 강우량은 다소 안정된 상태로 회복됐지만, 가뭄이 시작되기 전만큼의 양에는 미치지 못했다. 1980년대 초엽, 다시 연간 강우량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강우량은 드디어 1984년 기록을 경신하며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 해의 강수량은, 간신히 견딜 정도에 불과했던 가뭄전평균 강우량의 60퍼센트가 채 안되었다. 재해가 새로이 끔찍스러운 양상을 띠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하천들은 유수량이 줄거나 완전히 말라버렸다. 서힐 지역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차드호수의 경우, 1960년대에는 호수면적이 거의 2만 6000평방 킬로미터에 달했으나, 1985년도에는 거의 90퍼센트 가량이 줄어들었다. 같은 해에 촬영한 위성사진은 세네갈 지역의 삼림지대가 1981년 이래 무려 95퍼센트 이상 감소됐음을 보여 주었다.

 이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먹을 양식도, 가축도, 의지할 자원도 없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아프리카 사람들, 특히 산간 벽지의 사람들이 기아와 아사 사이의 경계선으로 내몰렸다. 촌락 생활은 붕괴됐고 주민들이 이주했다. 그리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가뭄에 바싹 말라버린 부르키나파소 북부 고원지대 출신의 한 젊은이는 말했다.  우리도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먹을 것을 찾아 남쪽으로 갈 뿐입니다.  그의 말은 저 광활한 서힐 지역에서 신음하는 수백만의 고통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한때 흥청거리던 말리의 레레읍. 이곳에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모두 가뭄에 쫓겨 다른 지방으로 먹을 것을 찾아 떠났다고 1985년의 한 보고서가 밝히고 있다. 목동들과 농부들은 대도시 주변의 빈민굴에 운집한 채, 배척받고 굶주리는 집단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레레읍에는 여기보다 훨씬 더 혹독한 가뭄 피해지역의 피난민들이 기진맥진 몰려 들어왔다. 어딜 가나 말라붙고 쓸모없는 밭이 방치되어 있다. 표토는 맹렬한 먼지 돌풍과 물결처럼 흐르는 모래 언덕에 씻겨 사라졌고, 나무 한 포기 없는 평원은 돌풍의 일격에 속수무책 알몸을 드러냈다.

 1984--85년도 기아, 특히 에티오피아의 기아는 부유한 나라들의 가정까지 그대로 전달됐으며, 이에 자극받은 세계 각국으로부터 원조가 쇄도했다. 이 끔직한 가뭄기에 무려 200만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데, 에티오피아 한 나라에서만 희생자 중 절반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긴급 구호활동이 없었다면 무수한 사람들이 더 희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발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극복되지 않았다. 게다가 엄청난 양의 구호 곡물 중 상당 부분이 부패한 현지 관리들에 의해 빼돌려지거나, 혹은 내전에 휩쓸려 수송로가 막히기도 했다. 긴 안목으로 볼 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공짜식량이 대량 유입됨으로써 가뭄을 견뎌낸 농부들의 수입이 감소하게 됐고, 농업의 재건이 더한층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에티오피아정부는 이런 자급 농경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 지역의 식품가격을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함으로써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1985년 연말 이전에 약간의 비가 다시 내림에 따라 곡물 산출량이 증가했고, 가뭄이 수그러들 것이라는 희망을 낳았다. 그러나 비가 온다고 해서 죽은 생명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었고, 경제가 재건되는 것도 아니었다. 서힐 지역의 정부와 사회기관들은 여전히 위기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 많은 정부들이 내전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농업을 지원하지 못했다. 또 일부국가에서는 식량이 전쟁 무기로 악용되었는데, 에티오피아의 경우가 특히 심했다. 그 결과, 비관주의가 만연했다. 부르키나파소의 한 구호 요원은 말했다.  우리들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럴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정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인가의 여부는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기상학자들은 이 가뭄이 우연히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이 지역의 항구적인 건조화 현상을 예고하는 전조인지 아직 단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어느 경우든, 서힐의 기상 조건에 관해 어떻게 손써 볼 여지는 거의 없는 것이다. 가뭄을 대재앙으로 발전시킨 그 사회적, 정치적 세력이 바뀔 가능성, 그것도 아직 건질 만한 무엇이 남아 있는 동안에 바뀔 가능성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지구의 이쪽 지방에서는 시간이 그 무엇보다 귀한 재산이다.  오늘 먹을 식량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어느 에티오피아 사람이 몇 킬로미터를 걸어와 마지막 재산인 황소를 팔아 병든 가족에게 먹이기 위한 식량을 구입하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