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쪼죠르노의 지진 참사


















   지진으로 마비된 이탈리아의 저주받은 마을

 이 재앙은 1980년 12월초 나폴리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크기가 메릴랜드주의 절반만한, 한 인구과밀 지역에서 일어났다. 그곳은 로마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메쪼죠르노라는 곳이었다.

 메쪼죠르노라는 말은 이탈리아말로  정오 를 의미한다. 태양의 열기 때문에 하루중에서 가장 무더운 시간인 이때부터 이른 오후까지 모든 활동은 정지된다. 그러나 이후부터 활동은 다시 시작된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침식 작용으로 형성된 아펜니노산맥 지역은 여름에는 햇볕에 타고 겨울이면 무자비한 비와 눈보라에 시달리는 지대였으므로 원시적 형태의 농경 이외에는 별 쓸모가 없는 땅이다.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년 내내 고되게 일해야 했다. 그러다가 저녁 때가 되면, 텔레비전이나마 가지고 있는 복받은 사람들은 세계의 많은 다른 지역에서는 삶이 그렇게 힘겨운 게 아니라는 걸 상기하게 된다. 또한 그곳을 정복했던 숱한 지배자들도 고통을 주었다. 최초로 등장했던 폭군 12세기의 노르만족이었다. 그후 게르만족의 짧은 지배가 이어졌고, 이들을 축출한 프랑스인들은 이곳의 가축에 세금을 부과하는 한편 소규모 농장들을 합병하여 거대한 봉건제 영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예전에 자작농이었던 사람들을 한낱 노동자로 전락시켜 버렸다. 18세기에 메쪼죠르노의 주인은 스페인의 부르봉 왕조로 바뀌었지만 봉건제적인 예 관습은 그대로 존속됐으며, 진정한 토지개혁은 제2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착수됐다.

 이 지역의 생활수준이 완만하게 향상되기 시작됨과 동시에 메쪼죠르노를 받치고 있는 두 조각의 거대한 지각이 연간 수 센티미터의 속도로 눈에 띄지 않게 서로를 향해 삐걱거리며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 늦가을의 조용한 일요일 저녁, 둘중 한쪽의 지각판이나 둘이 함께 몇 센티미터 정도 이동하면서 서로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미 몇 센티미터에 불과한 지각의 이동은 65년만에 유럽을 강타한 최악의 지진이 촉발되기에 충분했다. 곧 죽음이 아펜니노산맥을 덮쳤다.

 지진은 11월 23일 오후 7시 35분에 시작되었는데, 세계 각처의 지진계에 리히터 지진계로 6.5도로 측정되었다. 불과 몇초 만에 마을들 전체가 붕괴되었다. 길고 끔찍했던 그날 밤 내내, 이탈리아 남주 지방 전체가 흔들렸다. 당시 200개 이상의 도시, 소읍, 촌락들이 일주일동안 땅이 흔들리고 굉음이 울리는 여진에 시달렸다.

 차를 몰고 티레니안해변을 따라 달리던 루이지 이안노네는 살레르노시 외곽에 이르러 차창을 통해 이 광경을 보고 나서 경악과 공포에 빠졌다.  눈앞에 빌딩들이 마치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었고 전깃줄과 전차의 선로가 내 차의 지붕 위로 떨어졌어요. 정말 끔찍했습니다 하고 그는 회상했다.

 진원지서 2km 남짓 떨어진 라비아노라는 언덕 마을은 어느날 갑자기 지상에서 사라졌다.

 진원지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20km 떨어져 있던 발바노시에 있는 15세기 때 세워진 산타마리아아순타교회는 300여명의 신도들이 예배를 보고 있던 도중에 무너졌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첫영성체를 준비하고 있던 아이들과 그 어머니로 모두 81면이 사망했다.

 사실 그 끔찍했던 11월의 그날 이전에도, 나폴리시의 전체 건물 가운데 4분의 1이 주거지로서는 안전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지진이 이 도시를 강타했을 때, 수천 명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지진의 진원지인 라비아노로부터 약 240km 떨어진 로마시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서는 60m 높이의 관제탑이 어둠 속에서 흔들리자 항공관제사들이 모두 지상으로 기어내려왔기 때문에 기능이 정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참담한 인명피해는 내륙지방에서 일어났다. 발바노 마을의 살바토레 파글리우카 신부는  세상에 종말이 닥친 것 같았습니다. 미칠것 같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피해 지역의 참상을 보도한 최초의 사진 중에는 발바노에서 매장을 기다리는 사체들이 공터에 한줄로 널려 있는 모습을 담은 것이 있었다. 담요 등으로 덮인 사체들은 발이 모두 하늘을 향한 채 밖으로 나와 있었다. 이 장면은 순회 신부인 에토레 산토리엘로가 미사 도중에 갑자기 제단이 흔들리더니, 곧 벽 전체가, 이어서 지붕이 울부짖는 신도들 위로 덮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어안이 벙벙한 채 목격한 얼마 후에 촬영된 것이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도나타 자릴로라는 90세 된 할머니는 집이 폭삭 가라앉은 순간 부엌 바닥에 쓰러진 채 암흑 속에서 그 자리에 갇혀 있었다. 30시간 후, 구조대원인 지안카를로 로키가 건물 잔해 밑에서 나무를 두드리는 희미한 소리를 듣고는 그 자리를 파내려 간 끝에 그 아래에 갇혀 있는 할머니를 발견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할머니가 그 안에 있었어요. 너무나 가여웠습니다. 할머니에게 이젠 괜찮으니 밖으로 나와도 좋다고 설득하는 데 무척 애를 먹었습니다.

 아벨리노읍에서는 알바 코르벨리 부인의 남편이 한 구조대원의 팔을 잡고 제발 자기 아내와 세 자녀의 사진만이라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모두 무너진 자기 집의 잔해 속에 깔려 있었다. 제발 도와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난 우리 식구들을 기억할 수 있는 물건 하나없이 외톨이 신세가 돼요.  그는 간청했다. 몇분 후, 그의 아내는 한쪽 다리가 부서진 채 남편의 팔에 안겼다. 그러나 아이들은 모두 죽었다.

 캄파니아주 콘자읍의 경우, 2500명의 마을 인구 가운데 80퍼센트가 목숨을 잃었다.  하느님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벌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30년 동안 몸 바쳐 이뤄놓았던 모든 것들이 30초만에 깡그리 사라져 버리고 말았어요.  안토니오 피키노는 이렇게 절규했다. 누군가가 마침내 산토메나마을과 전화로 통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곳에 전기와 물은 아직 공급되고 있습니까?  그 관리가 묻는 말에 저쪽에서는 떨리는 목소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는 이제 마을 자체가 없어요.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는 콘자읍에는 이제 가치있는 물건이라고는 없었다.  한 집의 잔해에서 우리가 찾은 유일한 물건이라곤 클래식 레코드집 한권뿐이었습니다.  한 주민이 말했다.

 메쪼죠르노 지방의 한쪽에서 이렇게 수백명이 졸지에 죽었지만 모든 희생자가 순식간에 생명을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26세의 어떤 여성은 텔레비전에 출연해 수백만의 이탈리아 국민 앞에서 자신과 그녀의 어머니가 72시간 동안 갇혀 있으면서 겪은 생지옥 같은 상황을 회고했다.

우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껴안고 있었어요. 사방이 모두 깜깜했지만 우리는 돌 조각들을 손으로 치워가며 어떻게든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기도를 올렸고 나는 그 기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오, 하느님, 제가 저 애보다 한 시간 먼저 죽게 해 주옵소서. 나는 저 애가 죽는 걸 볼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많은 것들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구조대원들이 우리를 끌어올렸을 때,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만져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은 차가웠습니다. 어머니가 죽음의 문턱까지 가 있었다는 뜻이죠.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재산과 인명피해 면에서 1980년의 이번 대지진은 대단히 참혹하였다. 3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7000명이 부상을 입고, 실종자가 1500명, 그리고 12만명이 삶의 보금자리를 잃었다. 더구나 아펜니노산맥의 협곡을 따라 음산한 소리를 내며 겨울의 첫번째 폭풍이 불어닥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또한 이번 재앙이 닥쳤을 때 정부가 보여준 굼뜨고 비조직적인 대처 방법에 분노와 충격이 일었다. 지진이 강타한 후 몇 시간 동안 당국의 조치가 늦어지는 바람에 수백 명의 주민들이 헛되이 목숨을 잃었고, 정부가 구조작업에 나섰을 때는 피해 지역의 험악한 지형 때문에 의료진과 차량이 통과하기에 애를 먹었다.

 메쪼죠르노 지역 전체가 비탄에 빠졌다. 지진이 발생한 지 15시간 후, 롬바르디아주의 산트안젤로의 한 보건 담당자는 무전으로 다음과 같은 분노의 메시지를 보냈다.  마을의 80퍼센트가 파괴됐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무너진 건물 더미에 깔려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구조자가 한 사람도 안왔다...길은 뚫려있다. 왜 아무도 오지 않는가?   시네르키아 마을에 최초의 구호물품인 식량이 도착했을 때, 조롱과 노골적인 증오가 환영을 대신했다.  저 돌더미 밑에서 사람들이  살려 줘요. 제발 이렇게 죽게 내버려 두지 말아요 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우리에게 빵을 갖다 주는 군요.  분노한 주민이 던진 말이었다.

 지진이 발생한 후 몇 시간 동안 국영 텔레비전 방송은 시청자들에게  재산 피해와 인명 피해에 대한 보고는 없다 고 단언했다.

 알레사드로 페르티니 대통령이 마침내 헬기를 타고 아펜니노산맥의 피해 지역으로 날아갔을 때, 당국은 더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우울한 기분으로 하늘을 날아본 정치가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페르티니가 탄 헬기는 안개 덮인 도로 위를 날아갔는데, 그 도로는 이제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 피해지역의 주민들을 찾아나선 친척들로 가득 차 있었다. 라비아노읍의 한 남자는 대통령을 가리키며, 핼리콥터는 오늘 날아와서 시찰을 할 게 아니라 어제 와서 구조작업을 했어야 합니다 라고 외쳤다. 또 포텐차마을을 방문한 대통령은 충격을 받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는 주위에 말없이 서 있는 군중들에게 나직이 말했다.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겠습니다.

 한편 수도인 로마에서는 이번 사태를 둘러싸고 각 정파간에 공방이 격화되어 정부는 붕괴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고나서 지난 1976년 북부 이탈리아를 강타한 참혹한 지진 사태 당시에 구조 작업을 이끌었던 외무차관 주세페 잠베를레티의 능숙한 지휘 아래 이윽고 정부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12월 12일까지 정부는 집을 잃은 사람 중 3만 7000명은 텐트에, 4만 3000명은 트레일러에, 3만 7000명은 열차의 객차에, 5만 3000명은 호텔 객실과 연안에 정박한 선박에 각각 수용했다. 이제 4만 4000명의 구조대원들이 아펜니노산맥의 피해 지역에 파견돼 구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일부구조대는 벌써 발목까지 침수된 긴급 난민대피소에 통로를 개설하는 작업을 도왔다. 또 어떤 구조대원들은 파괴된 지역의 잔해를 불도저로 밀어 붙여 평평하게 한 다음 사체의 부패 속도를 늦추고, 또 이같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급속히 번질 가능성이 있는 콜레라, 장티푸스 따위의 질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소독약을 살포했다.

 역사를 통해 인간들이 대재앙을 당한 후에 보여주었던 행동 양식과 마찬가지로, 메쪼죠르노 지역 사람들도 사태 후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뚜렷한 특징을 지닌 반응을 나타냈다. 첫째,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다시 한번 질서의 궤도 위에 올려 놓기 위해 용기있게 나섰다. 둘째, 그들은 자기들의 보금자리가 얼마나 참혹하게 황폐해졌건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에 머물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예컨대, 캄파니아주 콘자마을의 생존자들은 지진이 발생한지 3주 후에 맞이한 크리스마스에 행렬을 지어 임시 숙소인 텐트와 트레일러 사이를 조용히 빠져 나왔다. 그들은 임시 제단 앞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경축했다. 또 희생자들의 핏자국이 대광장의 건물 잔해에 아직도 남아 있던 발바노마을에서는 주민들이 좁은 공터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웠다. 아벨리노주의 솔로프라에서는 바깥에 사나운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텐트속에서 순회 신부의 주례로 지진 사태 이후 최초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의식에 쓰던 촛대를 찾을 수 없어 신부는 빈 맥주병에다 양초를 꽂아 사용했다. 극심한 피해 지역인 포텐자에서는 한쪽에서 수색대원들이 시체와 부상자들을 발굴하는 가운데, 39세 된 루치아 페페라는 여인이 트럭 앞좌석에서 자신의 여섯번째 아이인 여아을 분만시키기도 했다.

 비록 이런 임시 숙소에서 정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지만 호텔 객실과 연안에 즐비한 빌라를 무료로 이용하라는 정부의 권유를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들은 비교적 소수였다. 사람들은 비록 3세대로 이루어진 가정이라도 약 9.3평방미터의 부지에 마련된 임시 막사에서 복작대며 사는 걸 꺼리지 않았다. 여인네들은 빨랫감을 들고 물이 차가운 옥외의 샘물가로 나왔다. 어느 마을에서는 지진 사태 후 꼬박 1년이 지났는데도 1300명의 생존자들이 아직도 옥외에 4개밖에 설치돼 있지 않은 공동 샤워시설을 이용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알프스 산맥 쪽과 시실리 북쪽에서 차가운 겨울 바람이 음산한 소리를 내면서 불어왔다.

 캄파니아주 콘자시의 시장은,  로마와 나폴리 당국이 이곳 사람들이 농사꾼이고, 따라서 부서진 헛간에서 꺼낸 건초와 가축들을 보관할 만한 장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여길 떠나지 않을겁니다 라고 말했다. 주민수가 3400명에 불과한 칼리트리마을에서의 일이다. 폭풍으로 크게 피해를 입은 고지대 마을 사람들을 아말피해안의 호텔에 대피시키기 위해 마을에 도착한 호송트럭부대를 한 노인이 점잖게 가로막았다. 노인은 이 대피 작전의 지휘자인 젊은 경찰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훌륭하고 유능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마시오. 이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고, 우리가 죽기를 원하는 곳도 여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