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헬렌스산의 진노


















   장대한 폭발로 사라진 눈 덮인 산정

 미국인들은 빨갛게 달아오른 용암류를 쏟아내며 터지는 화산 폭발을 보는 것은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접해 있는 미국의 48개 주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화산 폭발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 5월 18일 몇 명의 과학자와 텔레비전 촬영팀들과 호기심에 찬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워싱턴주 동부의 세인트헬렌스산은 미국, 아니 전세계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자연 그대로의 화산의 격렬한 폭발을 보여 주었다. 햇빛 찬란한 그날 아침의 폭발로 약 27km 길이의 부채꼴모양 지역내의 생물은 모조리 죽어버렸다. 여러 곳의 호수와 강이 말라버렸으며 화산이 내뿜은 검은 재와 가루가 3개 주를 뒤덮는 등 주변 경관은 그 폭발로 인해 크게 바뀌었다.

 18세기 영국의 한 외교관의 이름을 딴 세인트헬렌스산은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브리티시 컬럼비아(캐나다 서남부의 주)까지 걸쳐 있는 캐스케이드산맥의 15개 화산 중의 하나이다. 이 산맥의 레이니어산, 후드산, 베이커산(1975년에 잠깐 분출했다), 그리고 너머지 수려한 산봉우리들 모두 수백만년 전부터 시작된 화산 폭발로 인한 용암과 암석 부스러기가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세인트헬렌스산의 계류에는 송어와 연어가 살고, 숲속에는 고라니, 검은꼬리사슴, 아메리카 라이온 등이 살고 있었다. 약 2900m 높이의 눈 덮인 산정의 잔잔한 모습은 균형미가 뛰어나 가끔 미국의 후지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세인트헬렌스산은 지극히 아름다운 외양과는 달리, 속으로 음험한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휴화산 지대에서의 화산 활동을 예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지질학에서 사용하는  예보 라는 용어는 예상되는 사건의 발생 시간, 장소, 성질, 크기 등에 관해 비교적 정밀하게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1978년 두 사람의 지질학자가 예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부실한  예보 를 발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한 세기 이상이나 잠자고 있었던 세인트헬렌스산에서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예보였다. 그들은 폭발 시간까지 예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산은 분명히 지켜보아야만 할 산이었다.

 화산 폭발의 조짐이 보인 최초의 신호는 1980년 3월 20일 산 봉우리 서북방에서 시작해서 한 시간에 무려 40번이나 반복된 일연의 미진이었다. 3월27일에는 드디어 폭발이 있었는데 그것은 산꼭대기에서 1950m 상공으로 재와 증기를 뿜어 올렸다. 우르릉 소리가 산중턱에서 계속 터져나오고 표면 여기저기에 금이 가는 것이 눈에 보였으며 직경 66m의 새로운 분화구가 하나 나타났다.

이제 화산 관찰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지구과학자들의 팀이 모여들어--대부분은 미국지질조사연구소에서 온 과학자들이었다--인접한 밴쿠버시에 있는 연구소에 지휘소를 마련했다. 각종 비행기들이 상공을 돌면서 지상의 변화를 사진에 담기도 하고 분출된 가스의 견본을 채취하면서 계속 넓어지고 깊어지는 분화구를 응시했다. 모든 방식의 모니터 장치--지진계, 경사계(지구 표면의 경사를 측정하는 계기), 온도계 등--가 선정된 장소에 설치되었다.

 가장 불길한 징조는 나날이 커지는 북쪽 사면의 팽대 현상이었다.

 특히 관측자들의 시선을 끈 것은 하루에 1.5m씩 불어나는 산허리의 돌출부위였는데 그것은 마침내 사면에서 90m 넘게 튀어 나왔다. 그 돌출부위는 위협적으로 보이스카우트 캠프와 휴양 숙박 시설이 있는 스피리트호를 향하고 있었다. 워싱턴주지사 딕시 리 레이 여사는 산꼭대기를 중심으로 반경 8km를  출입 금지 구역 으로 설정한 후 주민들을 소개시키고 이곳으로 통하는 도로들을 차단했다. 이 조치에 대해 반대했던 83세이 해리 트루먼은 스피리트호에 인접해 있는 자기 집을 비우기를 완강히 거절했다. 트루먼대통령과 이름이 같은 이 완고한 트루먼옹은 53년간이나 그곳의 호수와 산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관청의 명령이나 자연의 위협 따위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일요일인 5월 18일은 청명하고 아름다운 날씨여서 송어철의 개시를 축하하고 봄의 기쁨을 만끽하기에 알맞은 날이었다. 그러나 오전 8시32분 세인트헬렌스산이 터져 삽시간에 그림엽서처럼 아름답던 경치가 흉한 모습으로 변했다.

 후에 지질학자들은 그 대참사는 거의 동시에 발생한 네 개의 사건 때문에 촉발되었다고 결론내렸다. 중간 정도의 지진이 산밑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사상 최대라고 할 만한 큰 산사태가 발생하여 북쪽 사명이 스피리트호와 투틀강으로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뜨거운 가스가 암장에서 뿜어져 나와 지하수가 증기로 변하고 이것들이 합쳐지면서 새로 노출된 북면을 뚫고 어마어마한 수평 폭발이 일어났다. 이어서 새로 노출된 북면에서는 분기공이 하나 수직으로 뚫리면서 또 한 차례의 폭발이 일어났는데 이 폭발로 재와 혼합된 연기 기둥이 220km 높이의 상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산사태로 생긴 유동체와 파편들이 지면을 훑어 내리자 뒤이어 불어온 폭풍은 최고 시속 400km의 속도로 북쪽 27km 지점까지 휩쓸었다.

폭풍 때문에 500평방킬로미터 가량의 지역에서 약 600만 그루의 나무들이 뿌리째 뽑히거나 쓰러졌다. 이 지역에서 죽은 62명의 사망자들은 더러 나무에 깔려 죽거나 재에 의해 질식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망자 중 한사람인 30세의 데이비드 A. 존스턴은 세인트헬렌산에 일차로 도착한 미국 지질조사연구소 조사단의 일원으로서 토질견본 채취를 위해 분화구로 내려갈 것을 자원했다. 운명의 그날 아침 그는 산꼭대기에서 8.8km 지점에 있는 관측소에 있었는데 별다른 위험없이 안전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 불길한 돌출 부위를 지켜보고 잇다가 그것이 움직이는 것을 보자 무전기에다 대고  벤쿠버! 밴쿠버! 이게 바로 그겁니다!  하고 크게 외쳤다. 이것이 존스턴이 마지막 남긴 말이 되고 말았다.

 폭풍의 강도와 열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스피리트호 건너편 해리 트루먼옹이 막무가내로 버티고 있던 지점에 갑자기 12m의 높이로 뜨거운 진흙이 밀어닥쳤다. 직경이 18m나 되는 표석들이 8km를 날아오거나 굴러왔다. 한 부부가 세인트헬렌스산 북쪽 18km 지점의 한 호숫가로 몰고 온 이동 주택이 180m나 날아갔다. 세인트헬렌스산 북쪽 20km 지점에 세워 둔 트럭의 플라스틱 부품 전체가 녹아 버렸다. 폭발 지점에서 26km 떨어진 그린강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들은 심한 화상을 입었지만 물속으로 뛰어들어 목숨만은 건졌다. 하늘 높이 솟아 균형비를 자랑하던 산봉우리는 390m나 무너져 내려 분화구가 뚫린 폐산으로 변하고 말았다.

 섬뜩한 이야기이지만 일요일이 아닌 평일에 폭발이 일어났던라면 사망자수는 더 늘어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평일에는 약 300명이나 되는 벌목 인부들이 위험 지역 밖에 안전한 곳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제 폐허가 된 그 일대에서 일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운좋게도 화산 폭발로 일어난 범람은 예상한 지점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범람은  이류  때문에 매우 고약했다. 수분과 재와 폭발로 산산조각이 난 바윗돌의 뜨거운 혼합물이 북쪽을 휩쓸고 나서 스피리트호 저쪽에 있는 산마루를 사정없이 강타했고, 서쪽으로는 투틀강 유역으로 밀어 닥쳤다. 그곳에서 그 혼합물이 쌓여 길이 20km, 폭 1.6km, 깊이 수백 미터의 산더미를 만들고 북쪽과 남쪽의 투틀강 지류를 둘 다 기록적으로 범람하게 만들었다. 이 퇴적물에서 혼류가 계속 흘러내려 카울리츠강을 막고 그 큰 칼럼비아강의 수심을 12m에서 5m로 낮추었다. 따라서 바다로 나가는 배들은 포틀랜드항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이류 가 흘러내리면서 세사람 이상이 죽었고 엄청난양의 암석 파편과 베어낸 재목을 휩쓸어 감으로써 칼럼비아강 위에 32km에 걸쳐 뗏목이 적체현상을 빚어냈다. 또한 수백만 마리의 치누크연어와 무지개송어도 떼죽음을 당했다. 투틀강과 카울리츠강의 지나친 수온 상승 때문에 죽은 것도 더러 있고 대부분은 아가미에 화산재가 끼어서 죽었다.

 일차적인 위기는 지나갔으나 광범한 범람 위협은 남아 있었다.

 나무들은 폭풍에 쓰러지고 초목이 연기와 재에 덮이고 사면마다 지표가 새로운 화산재로 뒤덮여 침식 현상이 일어났다. 세인트헬렌스산은 간간이 이류를 토해내면서 폭발을 계속했다. 이듬해 봄의 우기를 생각해서 미육군공병대는 여름부터 겨울까지 댐과 제방을 쌓고 안전한 방향으로 수로를 뚫고 준설 작업을 하면서--무엇보다도 이 작업에 역점을 두었다--엉망이 된 자연의 복구 작업에 힘썼다. 1981년 11월까지 공병대는 투틀강, 카울리츠강 그리고 칼럼비아강에서 76만 입방미터의 암석 부스러기를 퍼올렸다. 또한 여러 달 동안 2억 5천만 달러를 들여 여러 개의 수로를 뚫고 칼럼비아강에 다시 배가 다닐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세인트헬렌스산의 폭발로 재와 파편들이 뒤섞인 연기 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는데 그 연기 기둥은 엄청나게 커서 길고 무시무시한 섬광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 연기는 구름이 되어 바람을 타고 동쪽으로 흘러가서 워싱턴주 동부, 아이다호주, 몬태나주 상공에 이르러 새까만 눈처럼 내려앉았다. 정오 전에 화산 동쪽 약 136km지점에 위치한 인구 5만 1000명의 도시 야키마 상공은, 맑게 개였던 하늘이 한밤중의 암흑으로 변했다. 그것은 한밤중보다도 더 어두웠다. 헤드라이트조차 소용없었다.

 최초의 폭발 1주일 후와 18일 후에 다시 화산이 폭발하여 새로 분출된 재는 서쪽으로 오리건주 서북구에까지 갔고 워싱턴주의 여러 다른 지역 상공을 뒤덮었다. 화산재가 떨어진 곳은 어디나 발전기와 엔진의 작동이 멎고 공기 여과기가 막히고 교통이 거의 마비되었다. 바람이 불거나 차량이 지나가서 화산재가 휘저어 날면 사람들은 마스크를 해야 했다. 화산재는 좀체로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물은 단지 그것을 돌아 나갈 뿐이었다. 치명적은 아니었지만 봄 작물도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나무에 앉은 먼지가 세찬 바람에 저절로 날아가기도 하고 호스로 나무에 물을 뿌리기도 해서 유명한 워싱턴의 사과는 건질 수 있었다. 더욱 다행한 것은 화산재에 독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그것은 안락한 문명을 건설했던 과학도 파괴적인 자연계의 폭발을 막는 데에는 무력하다는 인식에서 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 참사의 결과로 자연의 신속 한 회복력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어떤 초목은 폭발 지역에서도 결국 살아남았다. 특히 눈이 깊이 쌓여 있던 곳에서 그랬다. 곧 회색재 사이를 헤치고, 곧추 선 허클베리 그리고 말라도 빛깔이나 모양이 변하지 않는 루피너스--루피너스 뿌리는 질소를 식물의 양분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에 중요하다--와 같은 잡초들이 자라났다. 애벌랜치릴리가 자라기 시작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부활의 진짜 상징이었다. 개미와 땅다람쥐도 또한 살아 있었는데 이들이 요긴하게도 자기들의 지하 통로를 따라 메마른 재와 자양분이 있는 토양을 골고루 섞어 주었다. 이주성의 포자가 식물을 증식시켰다. 5200마리의 고라니와 6000마리의 검은꼬리사슴이 함께 몰살당한 곳에는 이주성의 고라니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개구리와 도롱뇽들이 시냇가를 따라 뛰노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지진 진원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연못가에는 버드나무와 붉은 오리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세인트헬렌스산 주위의 공유지는 오늘날 4만 헥타르의 국립 기념물 겸 관광 명소가 되었고 대폭발이 있는 지 3년도 되기 전에 이 지역에 원래 살고 있던 식물의 종의 90퍼센트가 다시 옛 모습을 나타냈다.

 과학자들은 세인트헬렌스산의 폭발로 예보 기술의 개발과 증진을 위한 연구 기회를 얻었다. 대폭발 이후의 계속적인 화산 활동에 관한 예보 기록은 매우 극적이었다. 즉 그후 7년 동안에 일어난 스물네번의 폭발 중 대부분은 정확하게 예보되었고 경우에 따라 며칠의 차이가 나기도 했다. 캐스케이드산맥의 다른 봉우리들이 앞으로 200--300년 이내에 폭발할 것이라고 예고하는 것은 가능하다. 또한 다음 폭발이 언제 일어나든지간에 인류는 지각 밑에는 지옥불이 있지만 그 속에는 또한 영구적인 자양분도 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