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산 대지진


















   중국의 공업중심지를 뒤흔든 대전율

운명의 1976년 7월 28일, 오전 3시 45분경 23초 동안 계속된 죽음의 강진은, 베이징 동남방 160km 지점에 위치한 석탄 채굴과 전력의 요충지이며 인구 밀고가 높은 탕산시 전역을 진동시켰다. 그러한 진동이 일어나기 바로 전에 섬광이 비운의 탕산시 상공을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었다. 그리고는 이 글의 한 단락을 읽는데 걸리는 시간보다도 짧은 시간내에 약 51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탕산시의 중심부는 카드로 쌓아올린 집처럼 삽시간에 무너져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리히터 지진계로 7.8 내지 8.2를 기록한 이 강진은 1.8m 높이의 공중으로 사람들을 내동댕이쳤다. 아직도 진동을 계속하고 잇는 지상에서 나무나 기둥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몇몇 사람들은 종이 팔랑개비 모양으로 몸이 흔들렸다. 마치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땅 위에는 수만은 구멍이 패였고 땅이 2--3m씩 갈라진 곳도 더러 있었다. 철로는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철제 울타리는 원래의 위치에서 무려 1.3m나 미끄러진 것들도 있었다. 농작물은 뒤집혀 흙 속에 묻히고 나무는 뿌리채 뽑혔으며 관목들은 마치 번갯불에 탄 것처럼 한쪽이 모조리 그슬렸다.

 탕산시의 경찰 간부인 호 슈선은 세상이 온통 무너져내리기 바로 전에 부인이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밖을 내다보니 먼지와 빗방울이 섞인 강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하늘에서 청록색 빛이 번쩍하는 것을 보았고 마치 화물 열차가 지나가는 소리처럼 지하에서 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습니다. 방바닥이 아래위로 덜컹덩거리며 흔들렸습니다. 나는 창밖으로 뛰어 내렸지만 땅이 앞뒤로 흔들리는 바람에 나둥그러졌습니다. 우리집도 무너졌습니다. 2--3분 동안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더군요. 그러나 곧 폐허가 된 집더미 속에서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어둠을 뚫고 들려왔습니다.

 탕산 서남방 97km 지점에 위치한 대도시인 톈진시에 있는 영빈관에 단체관광단에 끼어 남편 새뮤얼과 함께 묶고 있던 뉴욕 출신의 비애트리스 스타인버그 부인은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지층이 육중하게 울리는 우르릉 소리에 잠이 깼다. 객실과 방안의 모든 것이 건물 전체와 함께 요란스럽게 흔들리는 가운데 스타인버그부인은 다른 침대에서 자다가 잠이 깬 남편을 향해 상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하는 방바닥을 비틀비틀 걸어다가갔다.

 스타인버그부인은 이렇게 회상했다.  난 남편의 침대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죽어도 같이 죽읍시다 라고 말해죠.  어둠속에서 꼭 껴안은 채 스타인버그부부는 죽음을 기다렸다. 몇 분 동안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렇게 껴안고 있는데 침착하고 정중한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미국 친구분들, 다들 괜찮으십니까? 신발을 신고 우릴 따라오세요.

 뉴욕에서 온 관광객들은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와 관광버스가 있는 데로 갔다. 버스는 그들을 태우고 건물들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어느 광장의 한가운데로 조심스럽게 갔다. 새벽이 되자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미국 관광객들은, 여진의 위험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면서 말없이 앉아 있는 수많은 중국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수상 구프 휘틀럼과 그의 부인도 잠옷만 걸친 채로 7층 방을 탈출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부서진 건물 잔해들을 파헤치고 있었지요.  휘틀럼부인은 나중에 기자들에게 말했다.  건물들의 전면 전체가 내려앉아 있었어요.  휘틀럼의 말에 따르면 그 건물은  가운데가 완전히 둘로 쪼개졌는데, 갈라진 사이가 한 자나 되었다 는 것이었다.

 톈지의 낡은 건물 중에는 완전히 무너진 것도 더러 있지만 현대식 건조물들은 강력했던 당시 지진의 충격을 대체로 잘 견디어냈다. 그리고 사망자도 극히 소수에 그쳤다. 베이징에서도 구식 건물들이 많이 무너졌고 사망자수도 약 100명쯤 됐다. 그러나 중국의 수도 베이징이 심하게 흔들리기는 했지만 무척 놀란 대부분의 시민들은 벽토 먼지와 깨진 유리 조각들을 헤치고 대피했다.

최초의 진동이 있고 나서 두서너 시간 있다가 심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600만 수도 시민의 대부분은 집을 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진동이 계속되는 베이징 거리에서 수백만의 시민들은 임시 피난처로 대피했다.

 최초의 진동이 있은 지 24시간이 되도록 중국의 언론 매체는 그 재난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지진의 규모와 그 진원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베이징 시민들은 경찰과 관계 당국의 지시에 따라 집에 들어가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

 48시간 이내에 125차례 이상의 큰 여진이 중국 동북부에서 기록되었는데, 가장 강한 여진은 최초의 진동이 있고 나서 16시간쯤 되었을 때 발생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최초의 진동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탕산에서처럼 격렬하게 지진의 충격이 느껴진 곳은 없었다.

공식적인 발표가 없었기 때문에 탕산 참상의 전반적인 실상이 외부 세계에 알려지는 데에는 수년이 걸렸다. 그러나 베이징으로 후송된 외국인 생존자들의 말을 듣고 탕산시는 완전히 파괴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후에 나온 추산에 의하면 탕산시의 일반 건물의 95퍼센트와 산업 시설의 80퍼센트가 심각한 파손을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중국에서 세번째로 큰 석탄 지대였던 탕산은 거대한 굴뚝으로 가득 차 있었고 몇몇 굴뚝에는 얄궂게도  전쟁과 천재지변에 대비하라 는 모택동의 명령이 새겨져 있었다. 지진이 지나간 후 탕산에는 단 하나의 굴뚝만이 산산조각이 난시가지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전통적으로 재난을 보도하기 싫어하는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정치적인 혼란기에 일어난 탕산 지진의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처음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그 지진으로 말미암아  인명과 재산의 큰 피해가 있었다 라고만 했다. 그러나 그 참화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비공식 추계는 무려 75만--100만에 달했다. 이러한 숫자는 과장된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사실을 비밀에 부치려는 당의 강박관념 때문에 그것을 더욱 믿으려 했다. 3년 후, 총사망자 수에 대한 공식 발표가 마침내 나왔는데, 사망자수는 24만 2000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래도 그것은 큰 재앙이었다. 이들의 대다수가 탕산에서 죽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망자 수는 이 비극적인 사건의 일부에 불과하다.

몇몇 추계에 따르면 그 지진으로 인해 중상을 입은 사람이 약 16만 4000명, 반신불수가 된 사람이 약 1700명이었고 2600명의 고아가 생겼다.

그리고 탕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치고 친척이나 친구를 잃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사망률이 그처럼 높은 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었다. 우선 지진 자체가 대단히 강력했고, 그 진원지가 인구 100여 만의 도시 탕산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최초의 진동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밤에 갑자기 일어났다. 사실상 탕산 지진은 중국 과학계로서는 상당히 곤혹스런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중국 과학계는 여러 해에 걸쳐서 지진 예보에 대한 정교한 조직망을 개발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것은 동물들의 색다른 행동에 대한 관찰과 우물물의 수위 및 온도의 돌연한 변화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1975년 2월, 랴오닝성에서 발생한 대지진에 대한 정확한 예보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탕산 지진의 경우에는 경고를 해주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군이 앞장서 대대적인 구조 활동에 착수하는 한편 외부의 구조 제의를 일체 사절했다.

 지진이 발생한 지 몇 시간 만에 군 정찰기가 탕산의 피해 상황을 정찰했고 오후 5시경에는 식량, 물통, 의류, 의료품 등이 시내에 갇혀있는 생존자들에게 투하되었다. 그 다음날은 엄청난 수송차량이 구조대원과 비상 보급품을 베이징에서 탕산으로 나르고 부상자들을 베이징의 여러 병원으로 후송했다. 2주내에 10만명의 군대와 3만명의 의료진과 3만명의 건설단이 탕산 재건을 위해 들어와 있었다.

 처음에는 사망자들을 매장하는 일은 살아남은 친지들이 맡아서 했지만 사체 수와 전염병의 위험이 늘어남에 따라 군대를 동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플라스틱 백에 봉해진 시체들은 트럭으로 시경계선 밖으로 집단 매장지로 수송되었다.

 지진을 계기로 생겨난 여러 영웅적 행위에 관한 국내 신문 기사가 모택동주의적 정치 선전 문구로 윤색되었다. 모든 인민은  모주석의 혁명 노선을 따라 꺾일 줄 모르는 굳건한 의지를 갖고 반 지진 투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는 당의 지시를 Ga슴에 새긴 탕산시의 쩌 쩡민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도 있었다.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1976년 8월 30일자 (뉴욕 타임스)에 인용 보도되었다. 그것은 베이징의 인민일보 제1면을 이렇게 장식했다.  지진이 일어난 직후 쩌 쩡민은 엉망으로 파괴된 그의 집에서 간신히 기어나와 발을 질질 끌면서 걸었다. 그를 보고, 열세살짜리 딸과 열여섯살짜리 아들이  아빠, 어서와서 우릴 구해 주세요 하고 소리쳤다. 애들에게로 가려는 순간 루베이 지구당 위원회 서기 지우 광유의 집에서 사람 살리라는 또다른 외침이 들려왔다.

 당원으로서의 직분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쩌쩡민은 당 간부인 그를 구하러 갔다. 신문 기사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었다.  쩌쩡민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두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책감이나 비탄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이웃을 위하여 그리고 다수를 위하여 그는 서슴없이 자신의 아이들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종종 보이는 고압적인 선전 문구로 암울했던 몇 시간 동안에 많은 중국인들이 보여준 진정한 용기와 헌신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다. 탕산 대지진의 영웅들 중 하나는 경찰과 호 수선이었다. 호 수선과 열여섯 살 난 그의 아들은, 지진으로 집이 무너지기 바로 전에 탈출했다. 산산조각이 난 집더미를 헤치고 그들은 간신히 그의 부인과 다른 두 아들을 구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열네 살짜리 딸은 구하지 못했다. 맨발과 내의바람으로 호 수선은 권총을 손에 쥐고 쑥밭이 된 시내로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아들들의 도움을 받아 그는 폐허로 변한 집더미 속에서 19명의 이웃을 구해내고 그들 중에서 성한 사람을 골라 또 하나의 구조대를 편성했다. 피로도 잊은 호경감은 임시 경찰 지휘소를 만들고 혼돈에 빠진 인근 지역의 질서 회복에 나섰다. 불과 2--3일 사이에 호경감은 약 70명의 약탈자를 체포하여 임시 구치소에 가두어 놓았다.

 지구상의 어느 곳보다도 많은 지진 피해를 겪어온 중국에서는 지진을 정치적 격변이 일어날 징조로 보는 경향이 있다. 중국인들의 오랜 믿음에 따르면 지구가 흔들린다는 것은 현 왕조가 하늘의 뜻에 따라 곧 무너질 운명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중국의 공산 지배층은 그러한 생각을 한낱 미신에 불과 하다고 일축해버렸지만 중국에서는 미신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에도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그러한 믿음이 어느 정도 사실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탕산 대지진이 지나간지 6주 만에 모택동이 사망하고 하나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근 3년에 걸쳐 중국 정부는 탕산의 미래에 관해 토론을 계속했는데 탕산이 지진대에 위치하고 있다는 이유로 시의 재건에 반대하는 관리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1979년, 탕산을 원상복구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1985년에는 약 18만 5000세대가 그곳에 지은 새 주택에 다시 입주하게 되었다. 오늘날 비록 지진에 대한 저항력이 보다 강한 새로운 탕산이 폐허 위에 출현하기는 했지만 탕산시와 다수의 탕산 시민들에게 1976년의 그 무시무시한 23초 동안의 끔찍했던 기억은 아직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