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크리스마스 태풍


















   성난 폭풍이 다윈시를 파괴하다

 그해 크리스마스는 오스트레일리아 중북부 노던테리토리(연방 직할지)의 수도인 항구도시 다윈의 4만 7000주민의 뇌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날이 되었다. 1974년 12월 24일 밤, 자정이 지나자마자 사이클론 트레이시호가 굉음과 함께 다윈시를 강타, 불과 여섯 시간만에 이 수도의 90퍼센트를 황폐화시켰다. 폐허가 된 이 도시 상공을 비행하던 비행사는 다음과 같은 무전 연락을 보냈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다음의 히로시마의 사진을 본 일이 있다면 당신은 다윈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겁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열대성 폭풍의 계절인 여름 우기가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사이클론 트레이시호는 12월 21일, 다윈시 동북방으로 약480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라프라해에서 열대성 저기압으로 시작되었다. 다윈시 열대성 태풍 경보센터에서는 그날 오후 경보를 발하고 폭풍을 추적했다. 12월 22일에는 폭풍이 사이클론으로 한 단계 격상되었다. 사이클론은 그때까지만 해도 다윈시 정북방 208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차츰 서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계속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그것은 멜빌해안과 다윈시 북방의 배서스트군도를 강타하고 티모르해를 향해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2월 24일 이른 아침 갑작스럽게 방향을 90도 바꾸고 강도를 높이면서 똑바로 다윈시를 향해 불어왔다.

 그날 오후 내내 가끔씩 경보 사이렌이 울렸지만 지난 30년간 다윈시는 사이클론의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번에도 별일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생활 태도와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이름난 변경의 신흥 소도시 다윈시의 묘한 분위기가 바로 사람들의 그러한 판단착오를 낳았다. 유명한 박물학자 찰스 다윈의 이름을 딴 이 소도시는 1839년 영국군함 비글호 선장 J.C. 위컴에 의해 처음 발견된 한 항구 주변에 건설된 도시다. 1870년대 골드러시(새 금광지로의 쇄도)와 육상 전신선의 완공으로 금광업자, 상인과 모험가 등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자신만만한 70세의 다윈시장 해롤드 브레난은, 언제나 헬멧을 쓰고 누구한테나 자기를  호랑이 라고 불러달라고 강요하곤 했는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외진 이 도시의 독립 정신을 몸으로 구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남쪽의 큰 도시와 연결된 철도도 없었고 다만 한 줄기의 고속도로만이 오지의 사막지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누군가 말했듯이  이곳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외진 메마른 고장이다.

 다윈시에 가장 오래 산 주민 중 한 사람인 패트릭 오로클린 주교는 1949년부터 이 지역 교구를 맡아 왔다. 여러 차례의 사이클론 경보에도 불구하고 오로클린주교는 성모마리아 성당에서 자정 미사를 올리기로 했다. 미사가 시작되었을 때는 벌써 성당 안으로 빗물이 휘몰아쳐 들어와 주교는 발목까지 차는 물속을 걸어 제단까지 갔다. 이내 지붕창과 지붕을 덮고 있던 커다란 목재 파편들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뒤이어 전기도 나갔다.  촛불을 켰지만 계속 꺼졌습니다. 재빨리 촛불을 손으로 감쌌습니다. 나는 헌금 걷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주교의 말이다. 미사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사나운 바람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귀가하느라 애먹었다. 사이클론 트레이시호의 앞쪽 가장자리가 이미 육지로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광란의 밤이었다. 한 시경에는 이 도시의 대부분 지역에 전력 공급이 끊겼고, 모든 경찰차에는 운전이 불가능하므로 도로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새벽 2시 30분에는 세찬 바람이 라디오방송국을 공중으로 날려버렸다. 3시가 지나자마자 공항 풍력계는 시속 210km의 돌풍을 기록했고 바람은 계속 강해졌다.

 생존자들의 기억도 갖가지다. 엘리자베스 버튼 여사는, 강풍이 불어닥칠 때 자신과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 떨던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갑자기 지붕이 무서운 굉음을 내며 벗겨져 나갔습니다. 불과 몇초 사이에 집의 네 벽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겁에 질린 채 그 무시무시한 폭풍우에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죠.  식구가 모두 욕실로 대피했다. 엘이자베스 여사는 말을 이었다.  시어머니와 제 남편은 함께 세면대 밑으로 피하고 나는 두 아이를 끌고 욕조 속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이때는 벌써 욕실의 벽들도 다 날아가 버린 뒤여서 우리는 사실상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붙잡고 매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바람이 좀 가라앉자 우리는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려고 무너진 집채 밑으로 단숨에 내달았습니다.

 케이 모어랜드는 사이클론이 불어 닥칠 때, 시내 중심가에 있었다. 케이와 그녀의 친구들은 대피하려 했지만 그때 그들이 피신해 있던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근처의 한 호텔로 피했는데 거기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피신해 있었다. 그곳도 무너질 조짐이 보이자 임신부부터 먼저 호텔 냉각실로 대피시키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사이클론 트레이시호의 중심부가 다윈시를 지나감에 따라 새벽 4시경에 바람은 가라앉았다. 기압은 기압계들의 눈금에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떨어졌다. 폭풍이 지나간 걸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바람이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부터 강하게 다시 불어오자 옥외에서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제트 제임스와 바바라 제임스 부부는 네 시간 동안이나 집앞 울타리에 매달려 있었는데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그들은 울타리를 넘어가 반대쪽에 매달렸다. 태풍의 제1차 강타를 견디어 낸 집들도 바람이 뒷쪽에서 다시 불어닥치자 대부분 허물어지고 말았다.

 날이 밝아오자  쥐구멍에서 쥐들이 나오듯이 사람들은 엉망으로 허물어진 집에서 기어나왔다. 고 호랑이 시장은 전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집을 잃었다. 건물은 대부분 심하게 파손되어 수리가 불가능했다. 거리마다 찌그러진 각종 차량과 뿌리채 뽑힌 나무들로 어수선하게 뒤덮여 있었는데, 무너진 집벽과 지붕, 부서진 가구 조각까지 섞여 있었다. 튼튼한 철제 전신주들까지도 엿가락처럼 휘어진 채 쓰러져 있었고 새와 벌레들도 자취를 감췄으며 나무들은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다윈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으나 다행히도 사망자는 49명뿐이었다.

 다윈 시민들은 그 비극을 이겨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상대책위원회는 조직적으로 거리 청소 작업에 착수했고 구급차들은 중상자들을 공항으로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다윈시의 참상에 관한 최초의 보고가 크리스마스날 아침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도 캔버라에 전해졌다. 그날 저녁 늦게 제1차 구조대와 구호물자가 도착했다.

 생존자들을 위한 수용 시설이 부족해지자 후송 작전이 실시 되었다. 12월 26일 실시된 첫번 항공편을 통해 부상자와 임부등 700명이 후송되었다. 다윈시는 멀리 고립된 곳이어서 시드니나 기타 다른 남부 도시로 공수해야 할 사람의 수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시카고에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부상자들을 로스앤젤레스로 후송하는 수와 맞먹는 수였다. 28일에는 대^5,23^소형 비행기들이 동원되어 하루 동안에 8000여명을 옮길 수 있었다. 31일에는, 다윈시에서 공수된 사람은 2만 5000명에 달했고 그 외에도 1만명이 육상교통편으로 남부로 향했다.

 다윈 시민들은 사이클론 트레이시호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는 데 그들의 모든 재능과 역량을 발휘했고 참화를 입은 지 채 3년도 지나기전에 다윈시는 트레이시호 피해 이전의 인구를 거의 회복했다. 1985년이 되자 이 도시는 인구 6만 8500명의 연방직할지 수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여전히 다윈시에는 사이클론 트레이시호의 상흔이 남아 있다. 따라서 다윈시민들은 지난 크리스마스의 망령이 다시 나타나지 않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