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과의 지진


















   파멸적인 지진으로 폐허가 된 니키라과의 수도

 니카라과의 소두 마나과시의 1972년 크리스마스는 여느해보다 훨씬 더 들뜬 축제 분위기에 젖을 것 같았다. 그해 마나과시에서는 제20회 세계 아마추어 야구 선수권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니카라과팀은 전Sung기를 구가하던 쿠바팀과의 경기에서 승리해 미국과 함께 공동 2위에 올라 있었다. 홈팀이 승리를 거둔 날 밤에 마나과 사람들은 흥분에 들떠 폭죽을 터뜨리고 경적을 울려대면서 온 시내로 자동차를 몰고 다녔다. 승리의 축하는 그리에리아 드 마리아( 마리아 만세 )가 시작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리에리아 드 마리아는 24시간 내내 불꽃놀이와 퍼레이드를 벌이며 거리에서 춤을 추는, 바야흐로 크리스마스 명절이 시작됨을 알리는 전통적인 행사였다.

 12월 22일 저녁 9시30분과 10시 15분에 두 변의 미진이 마나과를 흔들었다. 지진이 진행되는 동안 별다른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일부 주민들이 지진에 대비해 야외에서 노숙을 하거나 옷을 다 입은 채로 잠자리에 들긴 했지만 공황 상태는 없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활발한 지진대 바로 위쪽에서 살아온 마나과 사람들로는 이런 일을 흔하게 겪었기 때문이다. 종종 땅 속의 진동이 지표면까지 전해졌고, 많은 주민들은 도시의 대부분을 파괴했던 1931년의 대지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12월 23일 토요일, 자정이 막 지난 후에 시작된 엄청난 비극에 대해서 마나과 사람들은 아무런 대비도 할 수 없었다.

 연이은 진동을 예고하는 첫 신호탄이 불운한 도시를 뒤흔들기 시작한 오전 12시 29분에 마나과 전지역의 시계들은 멈춰 섰다.

 니카라과의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타치토  소모사 장군과 그의 미국인 부인 호프가 교회에서 있었던 한 결혼 축하연에서 마나과의 화려한 엘 레티로 지역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소.  소모사는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우리는 첫번째 진동을 느끼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달려나갔소, 무언가가 호프를 내리쳐 그녀의 팔과 발목에 타박상을 입혔지요, 그리고 나서 다시 진동이 일어났고 또다른 진동이 뒤따랐소, 첫번째는 수평으로 진동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집에서 빠져나갈 시간이 있었어요. 두번째와 세번째는 위 아래로 진동했죠. 세번째 진동은 살인적이었소.  몇 분내에 적어도 도시의 70퍼센트 이상이 돌더미로 변해 버렸다. 석조 건물들은 사람들 위로 무너져 내렸고, 몇 달 동안 계속된 가뭄으로 건조해 있던 목조 건물에서는 화염이 치솟았다. 불길이 사방으로 번져가면서 마나과의 중심지는 단테의 지옥편에 나오는 한 장면을 방불하게 했다. 마나과를 방문중이던 미국인 교사 카멜라 라카요는 파괴된 도시에 만연했던  아비규환 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러대며 거리로 뛰쳐나왔고, 어떤 사람들은 파묻힌 가족들을 찾으려고 미친 듯이 땅을 파헤쳤습니다. 또 붕대로 사용하기 위해서 잠옷을 잡아찢는 사람도 있었어요. 한 젊은 여인은 죽어 버린 그녀의 아기를 품에 껴안고 거리를 쏘다녔고 그녀의 남편이 유령처럼 그 곁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첫번째 강진이 일어났을 때 마나과의 자원 소방대 대장 이었던 물리학자 산토스 지메네스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거리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그는 곧 14살짜리 아들이 아직 집에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지메네스는 집으로 달려갔고 돌더미 속에서 맨손으로 아들을 파냈다.

그들이 빠져나오자마자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때 이미 그의 아들은 호흡을 멈춘 상태였지만 그는 인공 호흡으로 아들을 회생시킬 수 있었다.

 가족의 안전을 확인한 지메네스는 소방 위원회가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그곳에 도착한 그는 눈앞의 광경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대부분의 소방 설비들은 수백톤의 석조 건물 밑에 묻혀 있었고 도시의 상수도가 여기저기 터져 물마저 부족했다. 소방 장비와 물이 없는 소방수들은 전지역이 타들어가고 있는데도 무기력하게 바라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마나과 전역에서 의료 관계자들은 온갖 힘을 다해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대처해 나갔다. 800개의 병상을 가진 시에서 가장 큰 종합 병원이 지진으로 파괴되어 75명의 환자가 사망했다. 그중에는 육아실에 있던 열일곱 명의 갓난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용감한 간호사들이 살아남은 환자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흔들리는 병원으로 달려 들어갔다. 매우 영리한 한 간호사는 여덟명의 미숙아를 감싸서 커다란 상자에다 넣고 자동차와 운전사를 구해 그곳에서 약 80km 떨어진 레온의 병원까지 후송하게 했다. 간호사가 챙겨나온 휴대용 호흡기 덕택으로 이 여덟 명의 아기는 모두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응급실 총책임자인 어거스틴 세데노 박사는 파괴된 종합병원 앞에 임시 야전병원을 차렸다. 박사는 환자를 차량으로 실어온 운전사들에게 의사들이 치료를 할 수 있도록 헤드라이크를 계속 켜놓고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병원측의 이런 헌신적인 노력으로 약 5000명의 부상자들이 야외 응급실에서 치료받았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시의 한쪽에 위치한 엘 호르미구에로( 개미탑 )라는 오래된 교도소에는 50명의 남녀가 수감되어 있었다. 살아남은 남자 수감자는 교도소 벽에 난 구멍을 통해 탈출했다. 교도소 내 다른 곳에 갇혀 있던 여자 죄수들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러댔고 어떤 동정심 많은 간수가 무너진 건물로 되돌아와 문을 열고 풀어주고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시에 있는 세 곳의 감옥에서 건물에 깔려 죽은 죄수는 모두 80명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500명은 탈출했다.

 토요일은 마나과의 봉급날이었으며 크리스마스 보너스가 지급되는 날이기도 했다. 대목을 틈타 한몫 잡으려던 수백명의 노점 행상인들이 중앙 시장 건물의 광장에서 밤새 야영을 했다. 지진은 그다지 튼튼하지 못한 이 석조 건물을 뒤흔들었고, 숫자를 알 수 없는 많은 상인들이 사망했다.

 토요일 새벽녘이 되자 마나과시가 입은 참상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도심지의 320개 구역이 시체로 뒤덮여 독수리떼가 넘보는 폐허로 변해 버렸다. 화재가 계속되면서 연기와 붉은 먼지의 장막이 모든 것을 뒤덮었다. 거리는 심하게 손상되었고 물, 전기와 모든 통신 장비들이 거의 파괴되었다. 이미 가뭄으로 부족한 형편이었던 식량 보급도 아예 끊겨 버렸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 중상자들은 2만명에 달했고 4개의 주요 병원은 파괴되었기 때문에 마나과의 의료 기능은 마비 직전에 도달했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폐허가 되었다. 마나과 시민의 절반 이상인 25만명의 사람들이 집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돌더미 위에는 부패 직전의 시체 5000구 가량이 놓여 있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을 조사하고 난 니카라과의 공병지휘관 호세 알라그렛 중령은 말했다.  과거에 이곳은 도시였지만 이제 더 이상 도시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

 그후에도 토요일 오후까지 여러 차례의 여진이 마나과를 흔들었다. 한 과테말라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지진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았어요. 그저 멍한 채로 거리를 걸어다닐 따름이었죠. 노변의 시체들은 대부분 치워졌습니다. 눈에 익었던 건물들은 전부가 심하게 파손되었습니다.

 마나과를 초토화시킨 지진은 리히터 지진계로 진도 6.25의 중간 규모 지진이었다.(진도 7.0 이상을 기록해야 대규모 지진으로 간주된다).

다른 곳에서라면 겨우 알아차렸을 정도의 지진이 그토록 크나큰 재앙을 가져온 이유는 무엇일까? 운나쁘게도 1972년에 일어난 지진의 진원지는 마나과시 바로 아래쪽의 그다지 깊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더 큰 원인은 마나과의 위치였다. 그 도시는 있어서는 안될 곳에 위치해 있었다. 화산들이 시를 둘러싸고 있었고, 도시 밑으로는 5개의 단층이 지나고 있어 지진이 빈발했다. 반복되는 화산 분화 때문에 마나과시는 견고한 암석 대신 90m 정도의 불안정한 화산재 위에 얹혀 있었다. 이처럼 불안정한 토대 때문에 마나과시는 활발한 지진대에 위치한 어떤 도시보다도 큰 위험을 안고 있었다.

 지진으로 그렇게 심한 파괴가 일어난 또 하나의 원인은 타퀘찰이라는 그 지방 특유의 건축물에서 찾을 수 있다. 도시 빈민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던 이것은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볕에 말린 아도비 벽돌, 석재를 쌓아올린 다음 고정되지 않은 진흙 기와로 지붕을 덮은 건물이었다. 전형적인 타퀘찰 가옥은 몹시 취약해서 지각이 요동하기 시작하는 순간에 붕괴되었다.

 죽음의 냄새와 질병의 위협이 도시를 뒤덮었고 수만명의 생존자가 마나과로부터 도망쳤다.

 가장 먼저 니카라과의 수도를 떠난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알려지기를 싫어하는 미국의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가 끼어 있었다. 지진이 일어나자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묵고 있던 휴즈는 리무진을 타고 공항으로 가서 밤을 보냈다. 토요일 아침 일찍, 소모사장군의 중재 덕분에 휴즈의 개인 제트기는 마나과에서 가장 먼저 이륙할 수 있었다.

 그 동안 구조대원들은 수천구의 연고자 없는 시체를 치우는 힘든 작업을 시작했다. 어떤 시체들은 휘발유를 흠뻑 뿌려 그 자리에서 화장해야만 했다. 다른 시체들은 서둘러 공동 묘지의 구덩이에 쓸어넣어졌다. 12월 26일, 이 도시를 피해 지나가 버린 크리스마스 다음날, 마나과 도심의 대부분이  오염 지구 로 선포되어 평평히 땅이 골아진 뒤 석회가 뿌려졌다. 도처에 도사린 공포에도 불구하고 많은 마나과 시민들은 폐허가 된 고향을 등지고 떠나기를 주저했다. 그들을 강제로 철수시켜 전염병의 발생을 방지하려 했던 당국은 먼저 식량이 시내로 반입되는 것을 차단했다. 그러자 폭리를 일삼는 자들이 기회를 틈타 빵 한덩어리를 2달러에, 음료수 한 병을 2달러에 팔았다. 게다가 도둑들이 마나과에 숨어 들어와 시민들이 미처 갖고 가지 못해 그때까지 남아 있던 귀중품들을 남김 없이 훔쳐갔다.

 마나과 시민 대부분이 지진 발생 후 처음 며칠 동안 넋이 나간 채 별다른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던 반면,  외부에서는 즉각 온정어린 구호의 손길을 뻗쳤다. 이웃 코스타리카에서는 지진 발생 불과 몇 시간 내에 의료진이 비행기로 날아왔고, 뒤이어 쿠바에서 의료진 두 팀이 더 도착했다. 미국에서도 의사와 간호사, 보급품, 그리고 완벽한 설비가 갖추어진 야전 병원 텐트 두채를 보내왔다. 온두라스에서는 치안 유지를 도와달라는 소모사의 청에 따라 200명의 군인을 파견했다. 20여개국 이상에서 식량과 의류, 공구들을 보내왔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개인 자격으로 자진해서 마나과 시민들을 도우러 나섰다. 그들 중에는 야구의 슈퍼스타 로베르토 클레멘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조국 푸에르토리코에서 개인적으로 구호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산후안에서 마나과로 보급품을 운반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목숨을 잃었다.

 구호 물품들이 마나과 공항에 쌓여가자 소모사장군과 그 일당이 외국의 원조물을 빼돌려 부당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실제로, 구호 물자가 이재민들에게 전달되지 않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산후안에서 추락한 비행기에 동승했던 것이다.) 관리들의 부패에 관한 소문은 지진 후의 재건 기간 내내 끊이질 않았다.

 수도를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으로 옮기자는 제안은 소모사에 의해 기각되었다. 그러나 그의 비판자들이 즉시 지적한 대로 소모사가 극구 버틴 이유는 마나과 도심에서 가장 좋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정부가 벌이는 사업으로 자신의 땅을 사들이게 하고, 국내로 들어온 외국의 원조 기금으로 자신의 손해를 보상하기 위하여 마나과에 머물렀던 것이었다. 이러한 부정은 분노한 니카라과인들이 모든 정치 계파를 망라하여 한데 뭉치게 만들었고, 소모사 정권은 결국 1979년에 막을 내렸다. 오늘날 마나과 도심은 대부분 재건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이 불행한 땅에 몰아닥친 지질적 격변에 뒤이어 정치적인 격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