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파Ki스탄의 괴물 파도


















   불가항력의 해일이 불운한 나라를 덮치다

 몇년에 한 번씩 거대한 열대성 저기압(사이클론)이 벵골만을 통과하면서 무시무시한 소용돌이로 발달하여 인구 밀도가 높은 방글라데시(전에는 동파Ki스탄으로 알려졌던 극빈국)를 강타한다. 폭풍은 엄청난 힘으로 가옥들을 부수거나 야자수를 뿌리채 뽑아놓고, 소택지와 강줄기 그리고 나즈막한 섬들이 있는 갠지스 삼각주 지역으로 바닷물을 밀어 올린다. 비옥하지만 불안전한 이 지역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수백만 인구의 삶의 터전이다. 그들 대부분은 최저 생활 수준의 어민과 농민들이다. 폭풍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아찔할 정도로 많다. 1963년에는 단 한차례의 거대한 폭풍으로 2만명 이상이 사망했고, 2년 후에는 두번에 걸친 폭풍으로 4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1970년 가을, 11월 13일 금요일 어두운 새벽의 사이클론은 그 어느 때보다 파괴적인 일대 광란이었다.

 그 엄청난 사태는 11월 10일 아침, 인도 해안 남쪽에 나타난 저기압으로 시작되었다. 강한 회오리 바람이 비를 몰고 시속 16km의 속도로 북쪽으로 이동했다. 다음 며칠 동안에 폭풍은 강한 열대성 저기압으로 발달해서 시속 160km 이상의 돌풍을 동반했다. 벵골만으로 세력이 모아진 사이클론은 거대한 파도를 일으켜 만의 머리쪽에 위치한 방글라데시를 덮쳤고 이 파도가 끔찍한 재난을 불러왔다.

  한밤중 우리는 남동쪽으로부터 점점 커지는 굉음을 들었습니다.  만푸라섬의 부유한 농민인 카말루딘 초드후리는 이렇게 말했다.  밖을 내다보니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저 멀리 한 줄기 빛이 보이는 거예요. 그 광채가 점점 다가오면서 커졌는데, 그때서야 그것이 거대한 파도의 물마루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초드후리는 재빨리 가족을 이층으로 불러모으고 파도의 공격에 대비했다. 파도가 밀려들자 만푸라섬은 만조 때의 수위보다 6m 이상이나 높은 물사태 밑으로 단숨에 사라졌다. 바닷물은 초드후리 집의 일층으로 넘쳐들어와서 순식간에 무릎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그의 집은 여느 초가집이나 대나무 오두막보다는 튼튼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버텨냈다.

 5시간 동안이나 초드후리의 가족들은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동이 트면서 물이 빠졌고 초드후리는 완전히 폐허가 된 광경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대부분의 낯익은 물건들은 모두 휩쓸려가 버렸다. 남아 있는 것들도 모두 진흙으로 덮여 있었다. 만푸라에서 자라던 4500그루의 대나무 가운데 겨우 4그루만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3만명의 섬 주민들 중에서 5000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다.

 7769평방킬로미터에 넓은 지역의 가옥들이 파괴되었고 들판은 황폐화되었다. 익사체들이 해변가에 널려 있었고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사체도 있었다. 삼각주 지역에서 가장 큰 섬인 볼라는 전체 인구의 5분의 1인 거의 20만명의 주민을 잃었다. 본토의 시타공시에서 떨어져 나온 13개의 작은 섬에서는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비공식 사망자수는 30만에서 50만명 사이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인구 밀도가 높기 때문에 (1km 당 390명 가량)실제 사망자 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금세기 최악의 자연 재해였다.

 사망률이 높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적절한 경고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한 기상위성이 벵골만에서 폭풍의 진전 과정을 추적했고, 방글라데시의 수도인 다카의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경보를 보도했다. 그러나 폭풍의 실제 강도를 분명히 경고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괴물 파도가 닥치기 3주 전, 해안에 상륙하기 앞서 요란하게 경고되었던 사이클론이 별 피해 없이 물러간 적이 있었다. 그런 오보를 경험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새로운 사이클론 소식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설사 닥처올 사태를 미리 알았더라도 갠지스삼각주 지역에서 확실한 피난 수단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델타 지역의 논과 주거 지역을 둘러싼 낮은 토담은 사이클론이 몰로 온 6m가 넘는 파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민들의 작은 고기잡이 배로 피난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귀중한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야자수를 붙들고 버티는 것이었다. 이 방법으로 어떤 사람들은 살아남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같은 피신처마저 미처 찾지 못해 죽었다.

 (뉴욕 타임즈)지의 특파원인 시드니 샨버그는 40살의 문시 무스탄세르 빌라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는 샤쿠치아섬의 가난한 농사꾼으로 자신의 세 아들과 두 딸이 파도에 떠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폭풍의 다른 많은 희생자들처럼 문시와 그의 부인, 그리고 아이들은 소용돌이치는 거센 물살에 휩쓸려 울타리 너머로 떠내려갔을 때 간신히 야자수 가지를 붙잡을 수 있었다. 어린 두 누이동생을 껴안고 있던 문시의 맏 아들은 한 야자나무에서 붙잡을 만한 가지를 발견했지만 파도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수가 없어요. 놓칠 것 같아요 라고 그가 울부짖었고 차례로 여동생들이 물에 빠졌다. 두번째 파도가 그의 머리를 쳤고 이 젊은이 역시 물 밑으로 끌려 들어갔다. 울타리 안 어느 곳에서는 문시의 둘째 아들이 비슷한 운명을 맞고 있었다. 그동안 문시는 야자수를 한 팔로 붙들고, 다른 팔로는 한살도 채 안된 갓난아이인 막내아들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연거푸 내리치는 물과 세차게 때리는 비로 문시 역시 아들을 놓쳤고, 울면서 어린 아들이 떠내려가는 광경을 지켜보아야 했다. 곧 또 다른 거대한 파도--처음의 물마루에서 파생된 강력한 역류--가 북쪽에서부터 섬을 뒤덮으며 문시를 나무에서 떼어냈다. 그는 다른 나무를 움켜잡았지만 놓쳤고, 다시 울타리 가장자리에 있는 마지막 야자수를 붙잡았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나무에서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내 아들딸들이 죽었고 이제는 남편까지 죽었다! 나도 죽어버리겠다. 더 이상 살시 싫다! 그리고 몇 초 후에 그녀는 그의 뒤쪽에서 맴돌고 있었다.

 문시는 팔을 뻗어 그의 부인을 잡아당겨 물이 빠져나갈 때까지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옷은 찢겨졌고 몸은 생채기 투성이였다. 부부는 천천히 고통스럽게 나무에서 기어내려왔다.

  물은 그때까지도 무릎 높이까지 차 있었다.  샨버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은 지치고 너무 슬퍼서 휘청거리며 떠다니는 사람과 동물의 시체 사이로 걸어나와 그저 부끄러움을 가릴만한 누더기라도 찾으려고 이웃집으로 향했다.  이웃 사람들은 죽었고 그들의 오두막은 부서져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아 있던 한 낯선 소년이 문시와 그의 부인을 발견하고는 나무와 시체에서 걷어낸 누더기를 주었다. 기진맥진한 그들은 침수된 땅 위로 쓰러졌고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문시 가족의 비극이 잘 보여 주듯 갠지스삼각주 지역의 어린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야자수를 붙들 힘조차 없었던 수만명의 어린이가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재난을 대피한 어린이들도 있다. 3일 후 해변에 떠밀려 온 나무 상자 속에는 3살에서 12상에 이르는 6명의 어린아이들이 살아 있었다.

 한 마을에서는 시체들이 강을 메웠고, 부풀어 오른 시체들을 붙잡고 떠내려온 두 소녀가 생존한 채로 발견되었다.

 폭풍우가 지나가고 난 후에 생존자들은 턱을 늘어뜨리고 눈은 초점을 잃은 채 진흙더미 속을 마구 파헤치며 실종된 가족과 친척을 찾아다녔다. 공포가 극에 달해 정신이상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 자바섬에 사는 한 노인은 52구에 달하는 친척들의 시체를 수습해서 한더미로 쌓아 올려놓고서는 그 위에 앉아 정신없이 껄껄 웃어댔다. 그는  여기 내 가족들이 있어  라고 기쁜 듯이 소리쳤다.

 갠지스삼각주 지역에는 사망자수가 너무 많아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생존자들은 시체에서 풍기는 악취를 막기 위해 머리와 코를 수건으로 동여매고 삽을 들고 작업을 시작했다.  우리는 공동 묘지에 5000명을 파묻었습니다. 라고 매장 후 며칠이 지나서 주민들은 이야기했다.  손이 아파 더 이상은 구덩이를 팔 수 없습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시체들을 임시변통으로 만든 뗏목에 쌓아놓고 바다로 밀어냈지만 뗏목이 밀물에 실려서 되돌아오는 사태도 가끔 있었다.

 재난의 참상이 외부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구호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이클론이 강타한 후 나흘이 채 못 되어서 식량과 의복, 의약품을 실은 적십자 구호 물자가 다카공항에 속속 도착했다. 국제 헬리콥터 편대가 피해 지역에 보급품을 공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호품과 구조 대원의 손길은 굶주림과 헐벗음, 질병으로 인한 추가 사망을 막을 수 있을 만큼 신속하고도 충분하게 제공되지 못했다.

 이 같은 인명 피해 외에도 사이클론은 갠지스삼각주 지역의 취약한 경제 기반을 근본적으로 허물어뜨렸다. 100여 만 마리의 소가 파도에 떼죽음을 당했고 수많은 어선이 바다고 휩쓸려 나갔다. 40만 헥타르 이상의 논이 침수되었다. 추수기를 겨우 두 주일 남짓 앞두고 있던 전체 벼작물의 75퍼센트가 검게 썩어 들어갔다. 마을사람들은 굶주림에 떨면서 몇 알의 이삭이나마 주우려고 진창 속을 헤집고 다녔다. 신선한 담수도 없었다. 도시 지역에 수도가 끊겼고 마을의 우물은 바다의 염분과 썩어가는 시체들로 오염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장티푸스와 콜레라 같은 풍토병이 다시 발병할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파Ki스탄 정부는 복구 작업을 의도적으로 지체했다. 파Ki스탄은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는 두 민족--동파Ki스탄의 벵골족과 서파Ki스탄에서 영향력이 큰 펀잡족--이 결합한 부자연스러운 혼합체였다. 그들을 잇는 가장 중요한 유대 관계는 모두 회교를 믿는다는 것이었지만 지나 수십 년 동안에는 그런 끈마저도 풀려 버렸다. 그래서 서파Ki스탄에 있는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관리들은 1970년도의 재해를 맞아 마지 못해 움직일 뿐이었다. 40여대의 군 헬리콥터는 구호 작업에 단 한차례도 나서지 않은 채 서파Ki스탄 비행장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50만톤의 곡식을 저장하고 있는 정부 창고가 삼각주 지역 근처에 있었지만, 이 저장 식량들 역시 방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5000만 달러가 넘는 외국 구호품의 도움으로 피해를 입은 삼각주 지역은 서서히 수습 국면에 접어들었다. 공중 투하된 쌀로 사람들은 굶주린 배를 채웠으며 집단 예방접종으로 콜레라의 창궐을 막았다. 우물을 청소하고 가옥을 짓고 다시 벼를 심었다. 그러나 동파Ki스탄 지역은 영원히 변해 버렸다. 서쪽 정부에 대한 적의가 계속 쌓여갔고 지역 독립 운동이 다수의 지지를 얻었다.

사이클론이 지나간 몇 주 후 시위가 일어났고 다음 3월에는 전면적인 내전으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불행의 땅에 더 많은 죽음, 더 큰 참상이 빚어졌다. 그러나 그러한 분쟁의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정치 집단이 태어났다. 그것은 사이클론이 만들어 낸 유일한 국가, 방글라데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