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대홍수


















   쓰레기와 돌더미로 뒤덮여 버린 예술의 도시

 비에 젖은 피렌체에 날이 밝자 그 화려한 도시의 예술과 문화를 소중히 간직해 왔던 모든 이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광경이 드러났다.

1966년 11월 4일 평상시에는 폰테베키오다리 아래를 유유히 흐르던 아름다운 아르노강이 격렬하고 험악한 기세로 돌변해서 거품을 내뿜으며 둑 밖으로 넘쳐나왔다. 폭우로 불어난 강물은 피렌체의 좁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상점과 박물관, 도서관들의 지하실을 채우고 명작들이 걸려있는 벽면을 기어오르는가 하면 서양 건축에서 가장 숭배받는 기념물들의 문을 들이받았다.

 피렌체 전역에 걸쳐 있던 수백 점의 그림들과 조상, 다른 예술품들, 그리고 수백만권의 책과 사본들이 아르노강과의 생사를 건 싸움에 직면했다. 과거의 보물들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과 삶의 터전도 위협받았으며 그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홍수가 건물을 무너뜨리고 수백명에 달하는 피렌체의 장인들의 도구와 재료들을 휩쓸어갔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났을까? 원인은 단지 비 때문이었다. 수백 년에 걸쳐 진행된 문명화로 북부와 남부 이탈리아의 언덕과 산지의 대부분에서 숲이 사라졌다. 매해 가을마다 내린 비로 가파른 산사면을 타고 거침없이 밀려내려오는 소규모의 급류가 발생했다.

급류로 인해 토양이 침식되고 강물이 불어났으며 아래쪽의 평야에서는 홍수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11월 3일 목요일은 마치 하늘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48시간 동안 무려 38cm 정도의 비가 쏟아졌다. 이틀 동안에 평상시의 넉 달치 강우량이 한꺼번에 쏟아진 것이다. 북부 이탈리아의 전역에 대홍수가 일어났다. 베네치아, 피사 그리고 피렌체와 같은 도시를 비롯하여 강물에 휩쓸린 750여 마을에서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익사했다. 아르노강 상류에 있는 수력 발전 댐의 관리인들은 제때에 위험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수문을 너무 늦게 열었고, 실제로 댐은 재난을 막기보다는 오히려 부추긴셈이 되었다.

 11월 4일 금요일은 피렌체의 축제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휴전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행사 준비를 하느라 피렌체의 거리와 광장은 이탈리아와 피렌체를 상징하는 오색 깃발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속 144km의 강풍을 동반한 목요일의 폭우 때문에 장식물들은 금방 흠뻑 젖고 찍어졌다. 금요일 새벽 3시쯤에는 물이 폰테베키오다리의 아치 꼭대기까지 불어났다. 지난 수세기 동안 아르노강의 유서 깊은 폰테베키오다리를 따라서 금세공 가게와 보석점들이 즐비하게 형성되었다. 피렌체에서 처음으로 임박한 홍수의 위험을 깨달은 사람들 중 다리의 야경꾼들이 곧바로 다리 위의 많은 상점 주인들에게 경고를 했고 상인들은 아직 여유가 있는 동안 값진 상품들을 구하러 달려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피렌체 시민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잠들어 있었다. 후에 (피렌체의 홍수 일지)를 책으로 펴낸 미국 작가 캐서린 테일러처럼 일찍 일어난 사람들은 아침에 밖을 내다보고는 대경실색했다. 아르노강은 급격하게 불어났으며 이미 떠내려온 쓰레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테일러는 이렇게 회상했다.  하숙집 여주인이 문간에 서서  퀘스트 아르노, 퀘스트 아르노!  라고 조용하게 탄식했는데 마치 잘못한 아이를 꾸짖는 모습 같았어요. 그러나 이층에 살던 다분히 보수적인 한 부인은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죠. 그녀는 평생 동안 아르노강을 바라보며 살았는데 한번도 홍수가 난 적이 없었다더군요.

 하지만 그 부인은 아르노강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비아데이네리의 벽에 걸린 대리석판에는 4m 정도의 높이에 손가락 표시가 있는데 이는 1333년, 역시 11월 4일에 폰테베키오다리를 파괴한 홍수의 최고 수위를 가리키고 있다. 아르노강은 1557년 9월 13일과 1844년 11월 3일에도 범람해 약 2m에 이르는 수위로 도시를 쓸어버렸다. 사실 피렌체는 큰 홍수 없이 한 세기를 무사히 넘어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르노강이 1966년 11월 4일의 끔찍했던 아침처럼 격렬하게 불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날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전의 모든 홍수 기록은 60cm 이상 갱신되었다. 도시의 일부 지역에서는 이층 방의 천장까지 차오른 강물이 6m 정도의 높이로 소용돌이치며, 그 압력으로 창문과 방문, 복도들을 부숴버렸다.

피렌체의 각 건물들은 격리된 섬이 되었고, 주민들은 옥상과 지붕 꼭대기에 고립되었다.

 격렬한 급류가 지하실로 들이쳐 건물 토대를 박살내었고 난방용으로 저장되어 있던 수천 리터의 기름이 쏟아져나왔다. 기름과 진흙, 그리고 파열된 하수도에서 나온 오물로 뒤범벅이 된 강물은 악취나는 진창의 바다를 이루어 프레스코화와 조상을 더럽히고 지나는 곳마다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오전 7시 30분이 되기 전에 송전선이 끊어졌다. 곧 전화가 불통되고 가스와 수도 공급도 중단되었다. 피렌체는 외부와 고립된 채 침수되고 있었다.

 원래 있던 폰테베키오다리를 무너뜨린 1333년의 끔찍한 홍수 이후에는 개축된 교량의 지주들이 아르노강의 주기적인 범람을 견디고 있었다. 그러나 강물이 나무와 자동차, 목재, 기름통 등을 몰고와 사정없이 교각에 부딪치자 위태로운 다리는 이 도시 주요 예술 관리인들의 최대 관심거리가 되었다. 폰테베키오다리의 금세공 가게들 위로는 덮개가 씌워진 회랑이 있었다. 그 회랑은 1565년 대공 코시모 1세의 명령으로 세워진 것으로, 그가 거처하던 아르노강 남쪽의 피티궁정으로부터 당시 정부 청사로 사용되던 강 북쪽의 우피치에 이르는 보호 통로로 사용되었다. 당시 이 길고 화려한 복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우피치미술관의 일부로 파라엘, 티치아노, 루벤스 등 여러 거장들이 남긴 자화상과 초상화들로 가득차 있었다. 시민들이 자랑하는 역사를 증언하는 이 모든 것이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었다.

 복도가 발밑에서 흔들리자, 우피치미술관 관장인 루이사 베케루치 박사는 기념물 감독광인 마치노 포시 박사와 몇몇 봉사자들과 힘을 합쳐서 위험에 빠진 작품들을 옮겼다. 구조팀은 다리의 붕괴를 염려한 베케루치가 모든 사람들에게 복도에서 나가라고 명령할 때까지 20여점의 그림을 가까스로 실어냈다. 그러나 피렌체의 예술국장인 우고 프로카치 교수의 고집은 상상을 초월했다. 프로카치교수가 거의 지나다닐 수도 없는 거리를 헤쳐 현장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예술품을 구하려는 그의 필사적인 노력을 막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를 중단시키려고 노력했지요 라고 포시는 회상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만류를 뿌리치며 화를 내는 거예요. 자신은 늙었고 우리에게는 아이들이 있다고 소리를 치더군요.  곧 나머지 팀이 복도의 프로카치와 합세했고 오전 10시 30분까지 모든 소장품을 구해냈다.

 놀랍게도 폰테베키오다리는 굳건하게 버티었다. 그러나 홍수와 싸움에서 중세 건축물이 거둔 승리는 피렌체의 나머지 지역에 심각한 피해를 안겨 주었다. 오래된 다리 밑에 늘어선 아치들이 평소보다 두 배나 불어난 강물의 흐름을 방해했다. 게다가 산더미 같은 돌부스러기들이 아치에 걸려 다리를 커다란 댐으로 변모시켜 버렸다. 다리 아래로 흘러야 할 강물이 급류를 이루어 다리 동쪽의 둑을 넘어 유서 깊은 피렌체의 심장부를 관통하고 있었다.

 폰테베키오다리로부터 몇 구역 상류쪽에 있는 데이카발레제리광장은 아르노강으로부터 이탈리아의 국립 중앙 도서관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도서관은 300만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어 미국 의회 도서관에 견줄 만했다. 아르노강물은 시속 64km의 속도로 광장을 가로질러 돌진해 도서관의 창문을 부수고 방대한 서가를 향해 수 톤의 진흙과 돌 조각들을 쏟아 부었다. 이로 인해 100만권 이상의 책과 문서들이 물 속에 잠겼다.

 홍수의 희생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산타크로체의 프란체스코대성당이었다.

 중앙 도서관 뒤에 자리잡고 있는 산타크로체 고딕 성당은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오, 로시니 등 많은 유명 인사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그러나 무엇보다고 손꼽히는 소장품은 1280년경에 거장 비오반니 치마부에가 그린 실물 크기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이었다. 수백년 동안 이 르네상스 예술의 원천은 산타크로체의 높은 제단 위에 영광스럽게 걸려 있었다. 그 후 이 그림은 우피치미술관에서 전시되었는데, 1966년 11월 대홍수가 일어나기 직전에 산타크로체로 되돌아와 수도원에 있는 작은 박물관에 걸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도 범람한 아르노 강물에 꼭대기까지 잠기고 말았다. 오전 7시간 조금 못 되어서 진흙과 기름이 뒤섞인 물이 성당 문을 밀고 들어와서 패널화와 프레스코화의 명작들에 보기 흉한 자국을 남기고 피렌체가 낳은 위인들이 잠들어 있는 묘지를 진창으로 뒤덮었다. 인접한 박물관에서는 치바부에의 700년 된 명작이 6m 정도까지 불어난 물에 12시간이나 잠겨 있었다. 홍수가 끝났을 때에는 그림에 있던 물감의 75퍼센트가 씻겨 없어진 상태였다. 남은 것은 얼굴의 일부와 부러진 몸체뿐, 그야말로 순교당한 미술품이었다. 이 그림은 후일 안정제 처리로 약간은 복구되었지만 다시는 원래의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한 구역 떨어진 곳에서는 호르네박물관의 값진 소장품들인 조각과 그림, 장서, 가구들이 4m 정도로 불어난 강물에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

호르네박물관과 강을 사이로 마주보고 있는 바르디니박물관에서는 박물관의 자랑이던 고악기 수집품들이 뒤틀리거나 갈라지고 있었다. 이는 강물 때문에 아교가 분해되고 목재가 불거나 진흙이 모든 것을 덮어 버린 탓이었다.

 폰테베키오다리에 인접한 건물에서는 하루종일 홍수와의 사투가 벌어졌다. 르네상스 박물관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할수 있는 우피치박물관의 주 전시품들은 아르노강물이 닿지 못하는 높은 곳에 있었다. 아래에서는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복구 총지휘자인 움베르토 발디니 박사는 프로카치, 포시 그리고 베케루치와 함께 100여점의 그림을 위층으로 옮기는 작업을 열정적으로 계속했다. 그러나 우피치미술관의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던 13만점에 달하는 예술 작품의 사진 원판은 손도쓰지 못했다. 그리고 건물의 다른쪽 지하실에 위치한 문서 보관소에 있던 4만권의 장서도 검은 진흙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미술 작품에 대한 애정이 구조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다. 베케루치감독관은 이렇게 기억했다.  아주 흥분되고 기진맥진한 날이었어요. 우리는 밤늦게까지 일했고 일이 끝났을 때는 지쳐서 모두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이번 피해가 얼마나 큰지 알겠던군요.

 홍수로 인해서 생긴 일화들 중에는 이와 비슷한 헌신과 용기가 돋보이는 것들이 많다. 과학사 박물관 겸 연구소의 소장인 마리아 보넬리 박사는 목요일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나서 연구소 1층의 아파트 방에서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그녀가 깨어 났을 때 벌써 물이 침대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며 빠르게 불어나고 있었다. 보넬리는 목숨을 걸고 박물관의 소장품--갈릴레오의 망원경을 비롯해서 아주 귀중한 과학 기구들--을 위층으로 옮긴 다음 문턱을 넘어 우피치박물관으로 운반하기 위해서 애썼다. 그녀는 허리까지 차 오른 물에 휩쓸려가기 직전에야 일을 중단했다.

 우피치 박물관이 그림으로 유명한 만큼이나 조각으로 유명한 바르젤로박물관에서도 아르노강이 끔찍한 광란을 부리기 시작해 미켈란젤로, 도나텔로를 비롯한 르네상스시대 거장들의 조각품을 4m 정도의 물과 진창 속으로 몰아 넣었다.(수주일 후에 복구자들은 정교하게 조각된 돌에서 수분을 빨아내기 위해 이 조각품들 위에 활석가루를 두껍게 덮어 씌웠다.)

 급류는 계속 밀려내려와 피렌체의 유명한 대성당인 산타마리아델 피오레 성당으로 향하는 좁은 길로 돌진했다. 얼마 안 가서 비에 젖어 있던 성당 앞 광장은 위험한 소용돌이로 변해 중앙에 세워진 아름다운 팔가 세례당을 위협했다. 이 피렌체의 소중한 상징물은 삼면에 청동판이 붙은 문이 달려 있었다. 모두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작품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대성당을 향해 동쪽으로 난 청동문은 로렌조 기베르티의 작품으로 후에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  이라고 찬양했을 만큼 구약 성경에 나오는 장면들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르노강이 세례당을 향해 불어나자 강한 물줄기가 문 사이의 틈을 통해서 뿜어나오면서 곧 문을 밀어젖혔다. 천국의 문이 양쪽 돌 문설주에 부딪치자 기베르티가 조각한 다섯 개의 청동판이 헐거워지면서 진창 아래로 빠져버렸다. 다행스럽게도 건물 주변의 철문이 청동판이 휩쓸려나가 유실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이 귀중한 작품들은 회수된 후 복구되어, 오늘날에는 악몽과도 같았던 시련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북쪽과 서쪽으로 세력 범위를 넓혀가던 아르노강물은 고고학 박물관의 지하실로 쏟아져 들어갔고 그 위층의 주요 전시실을 덮쳐 9000여점의 진귀한 에트루리아의 유물들이 진창으로 뒤 덮였다.홍수가 지나간 후의 박물관은 일꾼들이 매장된 보물들을 발굴하기 위해서 애쓰는 고고학 발굴지를 방불케 했다.

 아르노강은 피렌체의 미술품둘뿐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의 생활에 피해를 입히고 송두리째 파괴하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도심지는 피혁공, 방직공, 금세공사, 양털 소모사, 보석상들이 차지하여 오랫동안 피렌체 경제의 중추를 이루어 왔다. 특히 이들 장인들과 그들이 만든 상품을 팔던 가게들이 홍수의 피해자가 되었다. 비아치마부에 상가를 따라 도시 동쪽 구역에 보관중이던 화학약품들이 더러운 물과 뒤섞인 채 폭발하면서 창고들을 파괴하는 바람에 거리는 마치 폭탄을 맞은 듯했다. 6000여개의 피렌체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손에 삽을 들고 폐허가된 가게를 파헤치며 다시 생업을 복구시키려고 애쓰는 장인이나 상인들이었다.

 엄청난 파괴를 몰고온 홍수에도 불구하고 피렌체 시민들은 특유의 용기와 끈기로 이에 맞섰다.

 빅토르 벨렌과 엘리자베스 벨렌 부부는 홍수가 최악의 상태였던 그날에 대해서도 즐겁게 회상했다.  14세기의 궁전 꼭대기에서, 고립된 54명의 사람들과 촛불 옆에서 식사를 했어요. 전화가 없어서 사람들은 집에서 집으로 소리를 질러서 연락을 했고, 이런 식으로 베키오광장에 고립되어 있던 경찰대에게도 연락을 했습니다.  밤새 연락이 오가는 동안 벨렌부부는 마치 중세로 되돌아간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교황당과 황제당과의 전쟁 동안에도 이런 식으로 경고를 전했을 거 아니에요?

 아르노강이 드디어 원래의 물줄기로 되돌아갔을 때 피렌체는 50만톤의 진흙, 기름, 모래와 쓰레기더미가 남았다. 예술 그리고 장인과 깊이 연관된 피렌체 고유의 특성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피렌체 시민들은 이러한 도전에 분연히 맞서 일어섰고 전세계의 피렌체 찬미자들도 이에 호응해 주었다. 홍수가 끝나자 국제 단체가 구조 작업을 돕기 위해서 피렌체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진흙의 천사들  이라고 명명된 이들은 서구 문명의 값진 예술품들을 구해내기 위해 악취 풍기는 진창 속을 헤치고 다니면서도 기쁨에 찬 표정이었다.

 1966년 1월 21일, 한군데를 제외하고 피렌체의 모든 미술관과 박물관이 다시 문을 열었다. 홍수가 지나간 후 7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산타크로체의 박물관을 제외하고 모두 문을 연 것이다. 그때 피에로 바르젤리니 시장은  피렌체는 파괴되지 않았고, 무릎을 꿇지도 않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실제로 피렌체의 홍수가 자연의 광포함 앞에서는 인간이 만든 어떤 건축물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하긴 했지만 도시와 예술품의 복구 작업은 피렌체의 예술을 창조했던 르네상스정신이 오늘날까지도 피렌체 시민들 사이에 살아 있을음 보여 주었다.

     훼손된 걸작품을 복구하기 위한 피렌체 사람들의 노력

 피렌체의 홍수는 현대사에서 최악의 예술적 재난으로 불린다. 아르노강이 범람하여 약 50만톤의 진흙과 쓰레기가 도시를 뒤덮은 이후, 돌이킬 수 없는 예술적 손실을 입었을 거라는 예측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그런 낙담은 재난이 피해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발전시키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참작하지 못한 우려였다. 홍수로 인해 완전히 파괴된 미술품을 제외한 나머지 미술품들 중에서 복구 불가능한 것은 단 한 점도 없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예술 전문가, 과학자, 기금 조성자, 학생 자원 봉사자들이 전세계로부터 피렌체로 몰려 들었고 그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예술품 보존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홍수 이전의 기술은 원시적인 것으로 보였다.

 예를 들어, 미생물학자들은 침수된 수백점의 프레스코화를 망가뜨리고 있는 곰팡이를 방지할 수 있는 안전하고 효과적인 대책을 연구하다가 니스타틴이라는 평범한 위장용 항생제가 이에 안성맞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니스타틴은 알약 형태여서 벽에 칠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피렌체 대학 화학자들이 알약을 분무제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여 넓은 면적에 약을 뿌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전문가들의 협력으로 수분이 프레스코화의 표면에 스며들지 못하게 하는 화학 분무제가 개발되어 영구 보존되어야 할 물감이 수분으로 파괴되는 사태를 막게 되었다.

 피렌체의 예술 작품 복구 캠페인 과정에서 홍수와 무관한 예술품의 영구 보존을 위한 새로운 해결책이 발견되었다. 산마르코 수도원의 프레스코화는 홍수의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프레스코화의 회벽에서 화학적 변화로 생긴 흰 막 때문에 그림이 희부옇게 변해 있었다. 1년 가까이 걸린 연구를 통해 드디어 전문가들은 화학반응을 역전시켜 석고를 분해하는 방법으로 원래와 거의 똑같이 광택이 있는 상태로--새로 덧칠하지 않고--복원시키는 화공 약품을 찾아냈다.

 피렌체에 무자비한 상처를 안겨주었던 자연은 이번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해 예술품 복원전문가들을 도와 주었다. 기온이 낮고 습도가 높은 날씨가 지속되어 침수 되었던 많은 예술품들을 그대로 보존해 주었다. 예를 들어, 목재판에 그린 그림은 아주 천천히 건조되어야만 나무층과 게소(그림 밑에 칠하는 미세한 석회와 아교의 혼합물), 그리고 표면의 물감이 서로 분리되거나 벗겨져 나가지 않는다. 그 무렵 이미 12월로 기후가 건조해지고 있어서 예술 복원가들은 피티궁전의 뜰에 있는 대규모 감귤나무 온 실인 리모나이아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습도 조절이 가능하여 점차 습도를 낮춰 미술품들을 안전하게 건조시킬 수가 있었다.

 홍수 이후에 피렌체 사람들이 직면한 가장 큰 일은 침수된 책들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구 요원과 학생 자원 봉사자들의 헌신적 노력이 수만권의 서적들의 복원을 가능케 했다. 기존의 자원과 시설을 최대한 활용하는 탁월한 지혜가 복원자들을 또 한 번 성공으로 이끌었다. 자원 봉사자들이 끊임없이 조직되어 진흙 범벅이 된 도서관의 서고와 바닥에서 책들을 끄집어 내는 일에 투입되었다. 다른 자원 봉사자들은 얼룩 제거용 압지를 책장마다 끼워 넣는 일을 했다. 난방기들이 징발되어 임시 건조실에 설치되었다. 전에 고온에서 담배잎을 건조하기 위해 사용되던 창고를 복원자들이 인계받아 서적 건조실로 바꾸었다. 피렌체의 벨베데레요새에서는 전문가들이 건조된 책을 검사하고 제본 해체 작업을 감독했다. 시의 철도역에서 책의 낱장들을 물과 살균제가 담긴 대야에서 씻은 후 눌러서 수분을 제거하고 4시간에서 6시간 정도 널어서 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