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강타한 초강속 태풍  베라


















   사납게 휘몰아친 폭풍이 대도시를 황폐화시키다

 인구 약 130만명으로 아이키현의 현도이자 일본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인 나고야시 시민들은 1959년 초가을, 무척 분주했다. 자치 도시 승격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벌일 축제행사의 준비 때문이었다. 축제 준비에는 꽃수레와 악대의 행진, 축하강연 및 불꽃놀이등이 포함되었으며, 나고야시와 자매 결연을 맺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로스앤젤레스시에서는 축하사절단이 방문할 예정이었다.

 일존 최대인 혼슈섬의 태평양 연안에 자리잡은 이세만갑의 나고야 시민들은 이 도시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나고야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심하게 파괴되었으나 진보된 도시계획 아래 재건되어 1959년에는 일본의 주요한 항구 도시가 되었다.

 1610--12년에 지어진 걸출한 역사적 건물인 나고야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이 도시는 오랫동안 요업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후 섬유산업의 중심지로, 20세기에는 철강, 화학, 수송기계류 제조업으로 도시의 경제가 더욱 탄탄해졌다. 40km 반경내 약 30개 도시의 산업 중심지였던 나고야시는 북동쪽으로 약 260km 떨어진 도쿄시와 남서쪽으로 145km 떨어진 오사카시 사이에 있는 태평양 연안 지역의 정치, 금융, 문화의 중심지였다.

 나고야의 전통적인 상징은 수세기 동안 나고야성 지붕 위에 세워져 있던 돌고래처럼 생긴 한쌍의 바다 생물이었다. 키가 3m난 되고 온몸이 금빛 비늘로 덮인 이 동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고야성과 함께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그러나 성은 훌륭하게 복원되었고 번쩍이는 그 동물 또한 감쪽같이 새로 복제되어 다가오는 축제 때 자랑스럽게 전시될 예정이었다.

 9월 20일 일요일, 축제 준비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한 가지 불길한 소식이 일본 기상청으로부터 통보되었다. 마리아나군도(필리핀 동쪽에 있는 군도)의 사이판섬 남동쪽 약 280해리 해상 부근에 열대성 저기압이 형성되어 북북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날인 월요일, 그 열대성 저기압은 강력한 열대성 폭풍으로 변했고, 화요일엔 태풍으로 격상되어 경계경보가 내려졌다. 베라호라고 명명된 이 태풍은 1959년에 발생한 15번째 태풍이란 뜻에서 5915라는 번호가 붙여졌다.

 23일 수요일부터 25일 금요일까지 3일 동안 태풍 베라호는 그 위력에 별 변화없이 서서히 일본쪽으로 이동해오다가 26일 토요일 저녁, 풍속 260km에 달하는 강력한 바람을 동반하고 혼슈연안을 강타했다.

  끔찍한 태풍이 나고야시의 경우처럼 도시 전체를 휩쓸어버리는 일은 현대 일본사에서 흔한 일이다.

 태풍 베라호가 접근해 옴에 따라 비행기 운항이 중단되었지만, 나고야 시민들은 아무런 공포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주민들은 태풍에 대비해 덧문을 닫고, 비상 식량을 구입해 놓고, 커다란 통에 마실 물을 가득 채웠을 뿐이었다. 일본인들에게 폭풍경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특히 기상이 나쁜 달인 9월의 폭풍 경보는 더욱 그러했다. 더구나 태풍이 제대로 발달하려면 일주일 이상 시간이 걸리는 데다 경로를 예측하기 힘들고 종종 태풍들은 열대성 폭풍으로 소멸되어 버리거나, 바다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태풍은 1년에 서너 차례 일본을 강타하여 희생자를 내고, 해마다 평균 1억 달러의 손해를 입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생활에서 태풍은 해일이나 화산폭발, 지진과 함께 피할 수 없는 위험이었다. 일본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에드윈 O. 라이샤워는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일본인들이 자연재해를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꺾이지 않고, 냉정하게 적응해 나가는 데 익숙해진 것은 태풍에 의해 길들여진 때문이다. 그들의 이런 운명론은  태풍 심리 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태풍을 좋은 징조로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뿌리깊은 믿음 때문에 강화됐을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 거대한 함대에 몽고와 고려의 대군을 태우고 일본을 침입했던 1274년과 1281년의 사건에서 연유된다. 칸이 침입해 올 때마다 태풍--카미카제라 불리는  신의 바람 --이 쿠빌라이 칸의 함대를 산산조각내 침몰시켜 쿠빌라이의 침략은 실패로 끝났던 것이다.

 어떤 일본인 전문가들은 폭풍이 일본 국가 경제에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일본의 1년 강우량의 8퍼센트에 달하는 5000억톤의 담수를 태풍이 일본열도에 해마다 공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정 때문에 5일 동안 나고야시의 주변 도시들은 그들이 살인적인 태풍의 진로에 놓여 있어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는 경고를 무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풍 베라호는 소멸되지 않았고 바다쪽으로 방향을 바꾸지도 않았다. 그리고 결코 자비롭지도 않았다.

자비롭기는커녕 베라호는 현대 일본사에서 가장 격렬하고 파괴적인 기상재해였으며, 다른 어느 곳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최악의 태풍으로 판명되었다.

 베라호는 가장 나쁜 시간대인 조수가 만조 상태인 토요일 밤 늦게 나고야시를 강타했다. 파도가 5m 높이의 물벽을 형성하며 파성추(성벽을 부수는 데 썼던 옛 무기)처럼 930평방미터 당 6톤의 힘으로 나고야시를 무너뜨렸다. 파도가 장애물에 부딪치면 바닷물은 폭발적인 굉음을 내면서 60m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댐, 둑, 안벽, 방파제, 교량, 건물 등 모든 것들이 그 무시무시한 파도에 산산조각 나 버렸다.

 이 잔인한 파도는 도시 곳곳에 있는 목재소를 파괴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던 통나무와 목재 더미를 무너뜨려 통나무와 목재가 폭포수처럼 거리로 휩쓸려 나왔다.

 한편, 시속 220km로 불어닥치는 바람에 가옥의 지붕들이 갈가리 찢기어 마치 포탄의 파편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만에서 범람한 물이 눈깜짝할 사이에 도시로 밀려들어 집에 있던 사람들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떠내려 가거나 익사했다. 지붕을 뚫고 피신한 사람들도 있었다. 한 커다란 아파트 건물이 붕괴되는 바람에 84명이 콘크리트의 잔해더미 속에 옴짝달싹 못하고 파묻히기도 했다. 한치 앞은 내다볼 수 없는 비바람 속에서 헬멧을 착용한 경찰들이 거리를 순찰하면서 보다 안전한 고지대로 생존자들을 대피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

 베라호는 3시간 동안 최고의 강도로 기승을 부리다가 도쿄를 지나 북쪽을 휩쓸면서 혼슈섬 북단을 가로질러 태평양쪽으로 방향을 바꾼 다음, 열대성 폭풍으로 바뀌어 소멸되었다. 베라호가 지나간 자리엔 엄청난 파괴와 죽음의 흔적이 남았다. 일요일 아침까지 나고야시는 3분의 1이 물에 잠겨 있었고, 나머지 지역에는 쓰레기더미, 진흙더미, 성냥개비처럼 흩어진 목재들이 높이 쌓여 있었다. 또한 시체들이 길위에 어지러이 널려 있거나 이세만을 둥둥 떠다녔다. 모두 21척의 배가 나고야 해변으로 떠밀려 올라왔는데, 그 중 7척은 원양선이었다.

 태풍이 강타한 도시 전역에서 사람들은 소용돌이치는 바다 위의 허술하기 짝이 없는 피난처인 지붕 꼭대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음식과 식수가 모두 부족했기 때문에 일부 태풍 이재민들은 침수된 부엌과 집안에서 음식물을 건져내기 위해 더러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후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모험의 결과로 이질에 걸려 고생했다) 어떤 이재민들은 값비싼 재산인 텔레비전이나 오토바이 등에 집착해 그것들을 포기해야만 자신들의 구조가 가능한 경우, 구조를 포기하는 사례도 여럿 있었다.

 도처에 절망과 혼란이 난무했다. 넋이 나간 이재민들이 줄을 지어 난민 보호소로 몰려왔고, 많은 사람들이 물에 젖은 침구와 옷꾸러미를 들고 처량한 모습으로 있었다. 다른 이재민들은 구해 낼 수 있는 재산을 건져보려고, 또 약탈자들이 귀중품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집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갈대 거적으로 덮인 시체들이 임시 시체 보관소 근처에 물에 젖은 벌판에 모아져 긴 줄을 이룬 광경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많은 시체들은 신원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나고야시의 주변 도시인 난교시 시장은 많은 사람들의 비통한 심정을 이렇게 대변했다.  마치 내 팔다리가 잘려나간 것 같다.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기고 시체로 가득 찬 모습만 보인다.

 바람, 비, 만조, 범람하는 물 때문에 구조 작업에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나고야의 재난이 실제로 얼마나 심각한 지를 도쿄 정부가 쉽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난민 구제활동도 지연되었다. 도쿄 당국은 도쿄시의 폭풍 피해에 관심이 쏠려 있었기 때문에 나고야시가 피해를 스스로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지나가는 헬리콥터의 주의를 끌기 위해 50명의 국민학생들이 도시 외곽의 산허리에 모여 일본어로  도와주세요 라는 글자를 만들기도 했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구조 작업에 참여했다. 미해군 헬리콥터가 식량과 다른 필수품을 높은 지대에 떨어뜨려 주었고, 공중을 선회하면서 환자와 건물 지붕 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끌어올려 구조했다. 연합 구조활동에도 불구하고 태풍이 지나간 지 일주일 이 지났건만 약 2만 5000명의 사람들이 여전히 굶주린 채, 지붕 위에 고립되어 있었다.

 이웃 도시와 외부의 새로운 소식들이 나고야시에 조금씩 전해졌다. 사실상 이세만 연안의 모든 도시와 마을들이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바닷물에 휩쓸려가 버렸다. 나고야시 남동쪽에 있는 한다에서는 300명이 사망했고, 거대한 파도에 250채의 가옥이 파괴되면서 수백명이 실종되었다. 또 다른 마을에서는 산사태로 가옥 12채가 함몰되면서 60명이 산 채로 매장되었다. 일본의 47현 중 38현이 심한 피해를 입었다.

 약 20만 헥타르의 농경지가 황폐화되었다. 과일, 곡식, 야채등 셀 수 없이 많은 농작물이 피해를 입었고 많은 가축떼들이 익사했다.

수세대에 걸쳐 바다를 매립해 개간한 논이 이제 염수가 들어와 앞으로 수년 동안 쓸모가 없게 되었다. 진주를 양식하는 굴양식장조차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태풍으로 인한 손실이 그렇게 컸던 것은 일본이 복합 연결 경제구조를 가진 현대 산업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전력선이 끊기고 또한 전화선이 끊겼으며, 텔레비전, 라디오 송수신탑이 마비되었고 기중기들이 쓰러졌고 비행장 시설물들이 파괴되었다. 혼슈 중부의 공장들도 문을 닫았다. 그리고 22대의 기차가 궤도를 이탈한데다가, 무수하게 많은 곳의 철로들이 유실돼 사실상 전국적으로 철도망이 마비되었다.

 정부 기관의 집계에 따르면, 태풍 베라호로 인한 재산 및 인명피해는 엄청났다. 5000명 이상이 죽었고 실종된 수백명의 생사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고 또 3만 2285명이 다쳤다. 재산 피해로는 근 4만 가구가 파괴되었는데, 총 손해액은 5000 내지 6000억엔, 즉 약 20억 달러에 달했다.

 일본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곧 재건에 착수했다. 그리고 아주 짧은 기간에, 20세기에 여러 재해들로부터 받았던 피해를 복구 해냈듯이, 1959년 초강속 태풍에 따른 피해를 복구해 나갔다.  자연의 무서운 힘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일본인들에 관한 글을 쓴 라이샤워는, 스스로 자신들을 구해내고... 불행을 딛고 다시 시작하는 일본인들의 위대한 능력 에 대해서 대단한 찬사를 보냈다.

 태풍 베라호로 가장 심한 피해를 입은 지역인 나고야시와 그 이웃 도시들 역시 이내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현장으로 되돌아 갔다. 실물 크기보다 훨씬 큰 한 쌍의 금빛 돌고래는 저 극심했던 바람과 홍수의 와중에서도 손상을 입지 않은 때 그대로 나고야시의 고성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살아남으려는 나고야시민의 의지의 상징으로서 계속 거기에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