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가 범람하던 날


















   바람, 파도, 밀물이 네덜란드에 재난을 초래하다

 북해에 위치한 네덜란드 젤란트 주의 조그만 어촌인 콜린스플라트의 제방관리주임은 1953년 1월 31일 토요일 밤, 평상시보다 더 주의깊게 안벽을 살펴보았다. 그날 일찍, 사나운 폭풍이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을 휩쓸고 영국 남동 해안과 네덜란드 남서부 사이의 해협에 수십억통의 물을 몰아넣었는데, 이로 인해 울부짖는 듯한 광풍과 거대한 파도가 거의 400면이나 된 그 안벽을 몇 시간 동안이나 강타하고 있었다. 아주 드문, 아마도 일세기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위력을 지닌 그 폭풍은, 해수면을 한층 끌어 올린 강력한 저기압과 한달에 두 번 해, 달, 지구가 일직선에 놓일 때 나타나는 한사리(조수가 가장 높이 들어오는 때--편집자주)와 우연히 때를 같이하여 닥쳤다.

 라인강, 마아스강, 그리고 쉘트강의 강어귀에 위치한 네덜란드의 저지대인, 젤란트와 남주 네덜란드 그리고 북부 브라반트의 해안선을 따라 건설된 거대한 암석 제방이 그 팽창한 바닷물의 공격에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콜린스플라트의 제방관리 주임은 모래주머니와 강화용 철제 및 목제 기둥을 모았다. 그는 또한 밤 사이에 상황이 악화되면 비상 사태에 대비하라고 시장과 시의원들에 통보했다.

 상황은 악화되었다. 자정이 지나 곧, 풍속은 시속 144km를 넘어섰음, 바닷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제방관리주임은 재해 경보를 울리도록 명령했다. 일제히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어민들은 경보용 종을 울리며 길거리를 질주했다. 건장한 성인 남자들은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장화를 신고 안벽으로 뛰어갔다. 그들이 거기에 도착했을 때 맹타를 가하는 파도 때문에 안벽 내부면을 따라 벽돌 버팀대 중 하나가 느슨해져 있었다.  방벽이 무너진다!  누군가가 외쳤다. 그 순간, 흔들거리는 기둥에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몸으로 벽을 막았다. 강화 대들보를 제자리에 끼워 넣을 때까지 그들은 줄을 지어 서서 어깨로 벽을 지탱했다. 그 끔찍한 2시간 동안 40명이 콜린스플라트와 얼음같이 찬 바닷물로 흠뻑 적셨지만, 방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콜린스플라트는 이렇게 화를 면했지만, 그날 밤 북해 연안 지역은 심한 재난을 당했다. 영국에서는 그 폭풍으로 최악의 강풍이 북쪽에서 몰아쳤다. 시속 약 180km의 강풍으로 바다 여객선 빅토리아프린세스호가 북아일랜드 해상에서 전복되었고, 30명의 여성과 어린이 등 130명이상의 승객이 목숨을 잃었다.(그 폭풍으로 영국에서만 총 30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영국의 동부 해안을 따라 강풍에 밀려 온 바닷물이 요크셔와 켄트에 이르는 방호시설을 휩쓸고, 그 후 수년 동안 약 630 평방킬로미터의 농지를 황폐화시켰다. 독일, 벨기에, 북부 프랑스도 이와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그 폭풍의 파괴력에 맞서 이겨낸 나라는 북해와 오랜 전쟁을 치른 역전의 용사, 네덜란드였다.

 토요일 밤 내내 바닷물의 수위는 계속 높아져, 제방 꼭대기와 평행을 이루게 되었다. 일요일 이른 아침 밀물이 들어올 때 예상 못했던 폭풍이 몰아쳐 네덜란드 남서부의 삼각주 지역 수십 곳의 제방으로 거센 파도가 밀려 왔다.

 수백 명이 자다가 사망했다. 그밖의 사람들은 아침에 깨어났을 때 물이 1분에 30cm라는 끔찍한 속도로 불어나는 것을 보았다. 곧이어 엄청난 물이 육지로 폭포수처럼 밀려 들어왔다. 수 세기 동안 네덜란드인이 바다와 투쟁해서 얻어낸 거의 20만 2500헥타르의 간척지가 침수되었다. 여러 도시의 불운한 홍수 피해자들은 귀를 멀게 하는 폭풍 소리에 경보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곳으로 대피했지만 그것마저도 그들의 발 밑에서 휩쓸려 갔다.

 농업과 어업을 주로 하는 그라벤에서는, 약 600명의 시민이 잠옷 차림으로, 도시의 안벽 안에 건설된 풍차방파제를 향해 달려갔다. 새벽의 여명 속에 이재민들이 거기에 몰려들었을 때, 양쪽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방파제가 붕괴되고 바닷물이 그들 뒤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양쪽에서 밀려 들어온 격류는, 물을 공주 60m까지 쳐올리며 풍차방파제를 들이받아 600명 전부를 홍수 속으로 내던져 버렸다. 남부 네덜란드 오버플라케이섬에서는 51명이 안벽으로 모여 들었다. 한가운데는 여자와 아이들이 꼭 뭉쳐 있었고, 남자들은 주위에 원형으로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지방의 한 교장 선생님이 무릎 꿇고 기도를 이끄는 도중에 거대한 파도가 그들 머리 위로 덮쳤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목숨을 건졌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감사하는 피난민들은 즐겨 부르던 네덜란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때, 빠져 나가던 파도가 안벽 밑을 무너뜨리고 그들 모두를 휩쓸어갔다.

 일요일 날이 샐 무렵, 삼각주 지역의 많은 섬과 반도가 물에 잠김에 따라 약 30만명이 위기에 처했다. 도시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지붕 꼭대기, 나뭇가지, 전봇대를 꼭 잡고서, 또는 다락방에서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로, 물난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테르담 근처의 스피이케니스 마을에서는 한 부부가 그들 집의 지붕을 붙잡고 있었는데, 아내는 한 팔로 굴뚝을, 다른 팔로는 남편을 붙잡고 있었다. 24시간 넘게 휘몰아 친 조수가 그 남편의 발을 금속으로 된 홈통에 부딪치게 했다. 그 부부가 구조되었을 때는, 약간 으깨어진 뼈를 제외하고는 그 짓이겨진 발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해안 지역에서의 위기는 일요일 오전, 네덜란드 전역에 알려졌다. 한 요트 애호가는 그의 배를 오버플라케이 북부 부르네섬의 피난처에 옮겨 놓고, 본토에 젤란트 지역의 여러 섬에 굉장한 홍수가 일어났음을 무선으로 알렸다. 수시간내에 수백 명의 자원자들이 대도시의 동원지점에 집결했으며, 이들은 삼과 모래주머니를 가지고 제방으로 급히 갔다. 그들은 최대한 노력했지만, 최초의 홍수 이후에 새로운 균열이 계속 생겼다.

 그 재난의 여파 속에서 네덜란드가 직면한 가장 급박한 문제는 폭풍에 의해 약화되었지만, 아직 서 있는 안벽을 지탱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무너진 제방을 다시 건설하는 보다 더 어려운 이 과업은 일 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추정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알고 있던 것처럼, 모든 방벽이 튼튼하게 다시 세워지지 않는 한, 상존하는 바다의 위협을 물리치고 물을 퍼내어 육지를 다시 찾을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 재난을 본 어떤 사람은 방호벽이 없이는,  이 사람들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라고 논평했다.

 방벽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사람들이 분투하는 동안, 수천명의 생존자는 홍수지역으로부터 소개되었다. 150대의 비행기와 2000정의 선박으로 구성된 국제적 지원대가 224시간 내내 활동하여 젤란트와 남부 네덜란드에 고립된 5만명을 구조하고, 다른 25만명에게 식량과 의료지원을 했다. 미국, 벨기에 그리고 영국의 군용 구조 헬리콥터들이 생명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월 4일 수요일, 일곱 대의 미국 헬리콥터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비행하며, 오버플라케이섬 내의 물 위로 드러난 여러 지역 또는 주택의 지붕 위에서 450명의 이재민을 건져 올렸다. 주로 어린이와 노인들이 구조되었는데, 그 중 일부는 비행기 동체에 묶은 들것에 실려 운반되었다. 제34공병대 소속의 잭 루비 소령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비행기를 띄우기 위해서 최고의 이륙 능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어떻게 이 사람들을 뒤에 남겨둘 수 있었겠는가 라고 말했다. 황폐화된 그 지역에서 하루를 보낸 한 네덜란드 장교는 그 직역을 목격한 느낌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여기에서 많은 기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중 최고의 기적은 헬리콥터였다.  방치되면 틀림없이 죽었을 2450명의 사람들이 헬리콥터로 구조되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헬리콥터가 너무 늦게 도착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구원을 요청했다. 많은 사람들은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에 맹추위 속에서 사망했다.

 며칠 지나서 네덜란드는 그들이 겪어 낸 그 고통의 타격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었다. 홍수로 전부 1850명이 사망했으며, 7만2000명이 소개되었다. 4만 7000채 이상의 가옥이 손상되거나 파괴되었다. 집약 농업을 하는 이 지역에서, 32만 4천 헥타르의 농지가 여러 날동안 짠 바닷물에 잠겨 있었고, 25만 마리 이상의 가축과 닭, 오리 등이 죽어 장기간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주었다.

 그들의 불행에 공감하는 외국인들은 침수지역의 일부를 영원히 포기해 버리라고 제안할 수도 있겠지만, 네덜란드 사람들은 쉽게 절망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어쨌든, 바다와의 전쟁은 그들 삶과 역사의 본질이 아닌가.  신이 지구를 만들고, 네덜란드 사람들이 네덜란드를 만들었다

라는 속담이 있다. 122세기부터 네덜란드의 주민들은 조금씩 조금씩 바다를 육지로 만드는 기념비적인 과업을 시작했다.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풍차를 네덜란드에 들여와 그러한 과정을 보다 능률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풍차는 네덜란드의 국가적 상징이 되었다.)

늪지대를 제방으로 에워싸고 풍차를 이용해 물을 퍼올려 해수면과 같은, 심지어 해수면보다도 낮은 옥토를 일구어 낸 것이다. 세기마다 네덜란드는 수백 평방 킬로미터씩 영토를 확장해 왔다. 네덜란드의 간척 기술자들이 그들의 기술을 발전시키고, 그들의 해안선을 서쪽으로 이동시켜 간척지를 넓혔다.  그러나 그러한 대담한 공사는 실패의 위험도 있는 것이어서, 때때로 바닷물이 넘쳐들어 네덜란드 사람들이 그토록 힘겹게 이루어 놓은 땅을 다시 집어 삼키곤 했다. 1953년의 재난이 대개 현대 네덜란드 역사상 최악의 홍수로 간주되지만, 인명의 손실과 지속적인 사회적 혼란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여러 차례의 과거의 범람에 비해 오히려 무색한 것이다. 1287년 12월 14일 추이더 제 지역에서 발생한 홍수로 5만명이 사망했다. 1421년 11월 18일 남서부 지역의 범람으로 적어도 1만명이 사망했고 72개의 도시가 파괴됐다. 1586년 11월 1일 16만 2천헥타르의 토지가 침수되었을 때도 1500명이 사망하였다. 사실 네덜란드에서는 대형 홍수 참사 없이 한 세기가 지나간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매번 그 재난이 지나간 후 네덜란드 사람들은 더 튼튼하고 좋은 방파제를 새로 쌓았으며, 1953년에도 그러했다.

 폭풍이 있는 지 3주 후에 네덜란드 정부는 위원회를 설치하여 서남부 델타 지역에 더 이상 북해가 범람하지 못하도록 할 방법을 연구했다.

두 개의 대안이 고려되었다. 즉 기존의 약 698km의 방파제를 더 높게, 더 튼튼하게 다시 건설하는 방안과 여러 방어댐을 건설해 삼각주 지역의 후미진 곳을 막아 버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약 640km 이상의 해안선을 줄여 버리는 방안이었다. 델타 위원회와 네덜란드 의회는 두번째 계획을 선택했다. 그리고 1958년 현대의 가장 야심적인 토목 사업이 시작되었다.

 델타 계획에 참여한 토목 기사들이 이겨내야 할 도전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약 30km의 댐을, 약 40m 정도 깊이의 빠르게 흐르는 바닷물 밑의 움직이는 모래 위에 건설하는 것이었다. 일을 해 나가면 경험을 얻기 위해, 기술자들은 쉬운 것에서 어려운 일로 작업해 나갔다. 즉 가장 작은 후미진 곳을 제일 먼저 막고, 가장 크고 복잡한 일은 맨 뒤로 미루었다.

 1986년 10월, 방어벽 연결망 중 마지막 연결부분--동부 쉘트 지역을 가로지르는 기념비적인 폭풍 방어벽--이 준공되었다. 밀폐된 댐의 경우처럼 강어귀를 막아 생태계를 변화시키는 것 보다 장벽에 62개의 거대한 철제수문을 설치해 조수가 정상적으로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물론 홍수의 위험이 있을 때는 언제라도 닫아 버릴 수 있었다. 오늘날 그 삼각주 지역의 사람들은 현대 과학과 네덜란드인의 창의성 덕분에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델타 계획에는 총 100억 길더(약 50억 달러)가 소요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람들은 홍수가 강요하는 인명피해를 아는 까닭에 그 모든 공사비의 단 한 푼도 헛되지 안았음을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