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치명적 안개


















   유독성 안개가 영국의 수도를 질식시키다

 유명한 일기작가인 존 이블린은 1661년 대부분의 런던 시민들이  매연 입자와 더러운 수증기가 섞여 있는 자욱하고 혼탁한 안개를 호흡해서 폐 건강을 악화시킨 결과 감기, 기침 그리고 폐병이 이 한 도시에서 세계 전역에서보다 더 기승을 부린다 고 썼다. 이블린은 집에서 쓰는 석탄의 악취를 상쇄하기 위해 찰스 2세로 하여금 더 많은 나무와 관목들을 화이트홀 주위에 심는 계획을 선포하도록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다시 300면 동안 가정에서의 연료 사용은 계속 증가했으며 이어서 공장, 발전소, 템스강의 증기선들이 사용하는 석탄은 런던의 공기를 더욱 오염시켰다. 종종 그랬던 것처럼 안개가 런던 전역에 짙게 드리우면 100만이 넘는 가구의 난로에서 나오는 연기가 내리 누르는 듯한 검은 스모그를 형성한다.  이리 와 여기 창문 앞에 서보게.  셜록 홈즈는 왓슨박사에게 말한다.  이렇게 황량하고 우울하고 무익한 세상이 있었겠나? 노란 안개가 길거리에 소용돌이치며 칙칙한 색깔의 집들 위로 떠다니는 것을 보게나.  그러나 그 위대한 소설 속의 명탐정도 그 노란색 혼합물 안에 어떤 치명적 오염물이 진동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영국인들은 쉽게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런던 사람들은 안개를 참아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자랑한다.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런던 토박이들은  그 옛날의 안개 를 한 번 보았으면 한다. 그 안개들은 영국 문학의 여러 작품에, 특히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서 어떤 특이한 분위기를 제공하였다. 길거리의 짙은 갈색 안개를  런던의 명물 이라고 명명했던 것은 그의 작중인물 중 하나였다. 소설 (황량한 집)에서 묘사된 도시의 중심부에 드리워진 안개는 대법관청에 의해 관리되는  어둠과 미로 속을 헤매는 것 같은  법정의 실태를 상징하는 것이다. 소설은 안개에 둘러싸인 도시의 모습을 강렬하게 환기시키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디나 안개다. 강 상류에도 안개, 강 하류에도 안개...안개는 석탄 수송선의 승무원 선실로 기어 들어간다. 안개는 안마당에도 깔려 있고 큰 배의 삭구 위로 떠다니고...가스등이 도로 여기 저기에서 안개 속으로 어렴풋이 빛을 발하고...대부분의 상점들은 보통 때보다 2시간 전부터 불을 켠다--그래서 그런지 가스등은 초췌하고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이다.

 디킨스 소설의 악당들은 자욱한 안개 속에서 그들의 가장 추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러나 문학에서 나타나는 안개와 죽음의 연관성을 1952년 후반에 무서운 현실이 되었다.

 이제 런던의 안개는 범죄자를 숨겨 주는 장막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대량 살인을 하게 되었다.

 12월 4일 목요일, 대서양에서 따뜻한 공기가 런던으로 이동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밑에 저온의 습도가 높은 대기가 갇히게 되었는데 이것이 기상 학자들이 기온  역전 이라고 말하는 현상이다. 영국에서는 드물게 지상에 형성되는 안개를 흩어 버릴 바람도 불지 않았다.

금요일 아침에 도시 전체가 짙은 노란 안개에 휩싸였고 다음 주 화요일이 되어서야 걷히기 시작했다. 짙은 암흑 속에는 조그만 매연 입자, 아황산 가스, 다른 오염 물질이 떠다녔고 폐의 아주 작은 공기 통로에도 침투해 들어갔다. 이윽고 4000명이나 되는 런던 시민들이 질식해 사망했다.

 처음에는 시민들 거의 모두에게 또 한 번의 지독한 안개로만 여겨졌다. 신문이나 라디오 어디에서도 특별한 위험에 대한 공식 경고가 없었다. 물론 병원에 평상시보다 더 입원 환자가 많은 것이 주목되었고 검시관들, 병리학자들, 사망기록관은 사망자수가 급상승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825만 런던 시민 대부분은, 그 안개가 걷힐 때까지 그것이 현대 최악의 대기 오염으로 인한 재앙인 줄을 몰랐다.

 신문 편집인들은 기자들에게 일상적인 안개에 관한 기삿 거리를 취재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이 보도한 사건, 사고들은 익숙하고 때로는 웃음을 자아낼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말에 이르러 취재 기사가 쌓여 가면서 기사의 어조는 전쟁에도 무감할 수 있었던 세대에게조차 불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최악의 짙고 더러운 안개 때문에 런던의 전차들은 다니긴 했지만 아주 천천히 움직였으며 충돌 사고도 있었다. 어떤 전차 사고 때는 승객들이 전차에서 나와 안전을 위해 손에 손을 잡고 사슬을 만들기도 했다. 앰뷸런스와 소방차들은 대원 한명이 앞에서 길을 안내해야만 나아갈 수 있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수백명씩 자신의 차를 길에 버려 두었는데 나중에 공기가 맑아졌을 때 차들은 분진에 덮인 채로 발견됐다. 지하철을 계속 운행되었지만 버스를 이용할 수 없는 승객들로 만원이 되었다. 월요일 저녁 러시아워 때는 중앙선 스트래드포드역 앞에 약 3000명의 통근자들이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비행기는 몇몇을 제외하고 이륙이 금지되었다. 덕택에 1년 전과 같은 사고가 반복되지는 않았다. 1년 전에 프랑스 항공의 비행기가 안개 낀 런던 히스로 공항에 착륙할 때 시야가 너무 어두워 그 비행기가 보이지 않았다. 5개의 수색 팀이 한 시간 이상 활주로를 헤매고서야 그 비행기를 발견할 수 있었으며 33명의 승객은 버스로 터미널에 옮겨졌다.

 주말에도 안개가 사라지지 않자 수백만의 런던 시민들은 난롯가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냉기를 쫓기 위해 더 많은 석탄을 태우는 바람에 오염을 악화시켰다. 외출할 필요가 있거나 또는 외출하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은 몇 발자국도 못가 길을 잃었다. 어떤 곳에서는 시계가 1m도안되었으며 템스강의 선착장에서는  자기 발을 볼수 없다 고도 보도되었다. 한 내과 의사는 왕진을 위해 장님 환자를 길 안내로 고용하는 기발한 생각을 해냈는데 아주 효과가 있었다. 범죄인들만 이러한 상황을 좋아했다. 런던 경시청은 짙은 안개를 틈타 폭행, 강도, 약탈 등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매연성 안개가 가옥내로 스며들었고 기관지염이나 심장병 환자들은 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죽은 사람이 없는 가정에서도 그 안개는 아주 골칫거리였다. 가정 주부들은 부엌의 끈적끈적한 먼지를 닦아내야 했고 또 우유도 배달되지 않았다.

 짙어가는 안개 속에서 극장 로비에는 다음과 같은 경고가 붙었다.  스크린 가시도 제로 고통을 당한 것은 인간뿐이 아니었다. 스미스필드 클럽의 전통 가축쇼에 참가하기 위해 모인 가축들은 안개가 깔린 첫 날, 초조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60마리가 수의사의 집중적인 치료를 받았다. 한 마리가 죽고 12마리는 도살될 수밖에 없었으며 도살된 우량종 중 2마리만 식용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위스키에 적신 마대 자루로 급조한 마스크로 몇 마리는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런던 시장의 돼지와 양은 그 스모그에 별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전체적으로 참을성 있는 런던 시민들은 그들의 무지막지한 안개의 전설에 또 한편의 이야기를 보탤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망자수가 전부 집계되자 그 이야기는 끔찍한 것이었다. 12월달의 정상적인 사망자수에 약 4000명이 추가되었고 나중에 그 4일간의 스모그의 영향으로 8000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병자나 노인들이어서 이전 같으면 이 치명적 안개가  최후의 온정의 일격 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1873년에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안개가 빅토리아 시대의 평온을 방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노인들의 끔찍한 사망자수가 여론의 우려를 자아냈다.

 그후 런던의 공해문제를 다룰 위원회를 설치했고 1956년에는 공기정화법이 통과되었다. 이 새 법은 매연방출에 엄격한 기준을 정하고 석탄을 석유나 천연가스와 같은 저유황 연료로 교체하는 가정이나 공장에 대해 정부가 지원을 제공했다. 이 조치에 대한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956년 1월 약 1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또 한번의 안개는 반대 여론도 질식시켰다.

 1952년의 안개가 런던의 공기를 정화하는 데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게 했지만 대기 오염에 대한 대중의 각성을 새로이 하는데 보탬이 된 공적은 단속적으로 지속되었던 반매연 운동에 돌려져야 한다. 런던의 대기를 오염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을 법제화하려는 시도는 존 이블린이 찰스왕에게 불평을 토로했던 것보다 훨씬 이전인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노력은 사업 발전이 특히 19세기에 진척됨에 따라 수포로 돌아갔다. 산업 혁명이 비약적으로 진전됨에 따라 굴뚝이 증가했으며 런던은 기관지염의 발생이 세계 최고였다. 그러나 대기 오염은 빈민굴이나 산업 재해와 함께 부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치러야 할 희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일반의 인식에 대항해 대기 오염의 위험을 지적하고 납득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한 과학자나 공직자들이 있었다. 1887년 과학 발전을 위한 영국 협회의 의장은 연설에서 런던 시민들이  난로에 석탄과 같은 조잡한 연료를 사용하지 말고 가스를 이용해 조리해야 하고 밀폐되지 않은 난로는 없애야 한다 고 주장했다. 런던 시위원회의 한 위원은, 1901년에  매연과 안개가 결합하면 인간 생활에 재앙을 끼치게 되며 런던 사람들이 그로 인한 인명 피해와 비용을 안다면 공해 문제를 저지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할 것  이라고 경고했다.

 런던이나 다른 산업 국가의 오염지역에서 발생하는 재난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경고는 별다른 주의를 끌지 못한 채 또 반세기가 지나갔다.

이러한 재난 중 가장 절박했던 것은 피츠버그로부터 모농겔라강 하류로 48km쯤 위치한 공장 도시인 펜실베이니아주 도노라에서 있었다. 스탠 뮤지얼이라는 위대한 야구 선수를 배출한 도노라에는 제강소, 아연 환원공장과 황산 제조 공장이 있었다. 이러한 공장들에서 배출되는 연기와 증기는 평상시에는 그저 불쾌한 것이었지만 1948년 10월, 3일간 계속되었던 대기 역전 현상에 의해 도시 상공에서 움직이지 않게 되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셋째 날이 되자 도시 인구의 거의 반인 6000명이 발병했으며 20명이 사망했다. 4년 후의 런던의 재난과 아주 뚜렷한 유사점들--대기의 역전 현상, 아황산 가스, 대기 중의 탄소 미립자--이 존재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런던의 대기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쓰레기는 돈  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영국에서 지지자들을 갖고 있으며 그들 중에는 고위 공직자도 있었다. 그러나 의회 위원회는 대기 오염으로 인한 희생이 재정적으로, 의학적으로 너무 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대기 오염 물질들은 또한 문화적, 정서적 대가를 강요했다. 웨스터민스터사원이 1245년 헨리 3세가 고딕식 탑을 세운 이래로 여러 세기 동안의 균열과 마모보다 부식성 매연 때문에 더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전문가들의 증언으로 많은 런던 시민들은 충격을 받았다.

  대기 정화법 은 효력이 있었다. 그 법의 통과 이래로 1952년의 살인적 안개에 필적할 안개는 나타나지 않았다. 햇빛과 가시도가 눈에 띄게 향상됐으며 놀랍게도 안개 자체가 줄어들었는데 이것은 안개와 대기 오염 사이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한 이론에 따르면 요즈음 런던에 안개가 덜 끼는 것은 운 좋게 날씨가 바뀌어 습도가 높은 서풍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기 오염으로 인한 먼지입자가 아무리 미세해도 안개 방울은 그러한 견고한 핵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그러므로 대기중에 매연이나 다른 미립자를 제거하면 안개가 생길 기회가 그만큼 준다.

 기후가 어떻게 되었든지간에 런던 사람들은 1952년에 그렇게 많은 사상자를 냈던 안개와 대기 오염의 결합을 또 겪어야 할 것 같지는 않다. 런던의  무지막지한 안개 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사람은 디킨스의 소설을 읽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