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파괴와 신앙인과의 관계


















저자: 이재돈(신정동성당 본당주임신부)

인간은 자연속에서 태어나고 자연을 이용하면서 살아가다가 자연안으로 다시 돌아간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자연과 함께 한 역사이며 자연을 이용하면서 살아온 역사이다. 그런데 오늘날 문제시 되는 것은 자연이용이 아니라 자연파괴이다. 자연이용과 자연파괴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전자는 공존개념이며 후자는 적대개념이다. 자연파괴는 인류사의 전과정을 통해 볼 때 현대 인간들에게만 국한된 문제이다. 그전의 인간들도 인간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연을 이용하기는 하였지만 현대인들처럼 자연을 파괴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연파괴는 현대문명에서부터 비롯된 문제이다.



현대를 휩쓸고 있는 문명은 서구 물질문명이다. 그것은 17세기 산업혁명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세계를 주도하는 문명형태이다. 이 문명의 특징은 물질에 대한 과학이론과 물질을 가공할 수 있는 기계기술이 발전하였다는 것이며, 이것들의 덕택으로 인간은 원하는 것들을 원하는 만큼 자연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문명의 덕택으로 현대인들은 그전의 인간들이 누리지 못했던 온갖 형태의 물질적인 편리와 헤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자연파괴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 문명 비평가들의 진단에 의하면 물질문명적인 삶의 방식이 자연을 파괴하였고 거기서 지구촌의 위기가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구물질 문명을 뒷받침하고 있는 서구의 정신문화는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그리스도교이기에 그리스도교도 자연파괴의 원인중의 하나로 지적받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땅을 정복하고 짐승들을 부려라."(창세1,28) 는 말씀을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으로 해석하였던 것이 바로 오늘날과 같은 물질 문명을 가능하게 한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강조하여 왔지만 자연사랑은 별반 중요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자연파괴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 우선적으로 강조해야 할 점은 자연안에 깃든 신성이다. 자연속에서도 인간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숨결과 손길이 머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연은 태초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후에 더 이상 손대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그 지배권을 넘겨 주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자연을 아끼시고 돌보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연창조는 과거에 일회적으로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는 영속적인 사건인 것이다. 하느님 창조의 숨결과 손길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자연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며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자연 속에는 하느님의 뜻 곧 창조질서가 그대로 새겨져 있는 것이다.



자연을 완전하게 보는 것은 원래 동양적인 사고에서 더 발달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 자연이라고 하면 그것은 가장 드높은 상태, 가장 완전한 상태를 표현하는 개념인 것이다. 자연이란 말 뜻부터가 "저절로 그렇게 되어 있는 모습"이란 뜻으로 인간의 손길이 닿기 이전의 상태를 뜻한다. 자연 속에는 인간의 뜻보다 더 높고 완전한 천지간의 뜻이 담겨져 있기에 인간이 할 바란 그 뜻에 순응하는 것이라는 것이 동양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물론 이것이 자연을 100% 순수자연상태로 보존하고 인간은 원시상태로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동양에서도 자연을 인간의 뜻에 따라 애용하고 개조하였지만, 동양은 자연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자연을 이용하고 개조하였다는 점이다. 자연을 완전하게 보는 동양인들의 통찰은 자연속에 깃든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알아보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인들은 비록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아니었지만 그들 나름대로 종교적 사색을 통하여 자연 안에 새겨 있는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해독할 수 있는 혜안을 키워 왔으니 이점에 있어서는 서양의 그리스도교보다도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자연파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동양적인 통찰과 방법론을 새롭게 되살려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한국인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역할이 있는 것이니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자연에 대한 동양적 통찰과 방법론을 이용하여 새로운 신앙 형태의 문명 형태를 개발하고 그것을 세계 교회와 전세계에 널리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자연안에 깃든 신성을 알아볼 때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의 지배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같이 하느님의 현현(顯現), 하느님의 성사(聖事)인 것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도 하느님의 표현이므로 자연과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한 몸이며 한 형제이다. 그동안 그리스도교는 형제 자매의 대상으로 주로 이웃만을 가르쳐 왔는데 앞으로 자연도 우리의 한 형제이며 자매라는 것을 강조해서 가르쳐야 한다.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라는 깨우침이 자연파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정신적 조건이다.



자연파괴로 인한 모든 것의 파멸을 막기위해 또 하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적 생활의 변화이다. 현대 물질문명은 풍요로운 물질생활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196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도 그 동안 '물질을 풍요롭게' '소비가 미덕'이라는 모토가 많이 쓰여 왔다. 물질의 풍요도가 행복의 기준, 더 나아가서 인간 평가의 기준이 되는 물질만능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은 변화되어야 한다.



물질을 풍요롭게 누리기 위해서는 자연을 파괴할 수 밖에 없는데 파괴된 자연은 결국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 현대 과학자들의 지식이며, 여기서 나온 개념이 엔트로피 법칙이다. 엔트로피 법칙이란 에너지 파괴의 법칙으로 그것은 이간이 어떤 물질에 손을 대면 그 물질의 활용도가 떨어지게 된다는 법칙이다. 따라서 인간의 물질문명이 발달할 수록 세상에는 점차로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줄어들게 되고 세상은 점차로 쓰레기장화 된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지구상에 출현한 것을 백만년전으로 보는데 지난 백만년 동안에 만들어진 쓰레기보다 요즘 몇년 동안에 만들어 내는 쓰레기가 더 많다는 것이며 그것이 갈수록 가속화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구 전체가 쓰레기장이 될 것이며 인간은 거기서 질식하여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가속화되는 지구 오염을 방지하기 위하여 물질 생활방식의 변화가 시급히 요청된다. 그 동안은 '물질을 풍요롭게'라는 모토를 사용해 왔지만 이제는 '물질은 필요한 만큼'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Need)와 탐욕(Greed)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올 때 누구나 생존에 필요한 것을 가질 천부의 권한을 지닌다. 실제로 세상의 재화를 각자 필요한 만큼만 소유한다면 이 세상에 필요한 것도 지니지 못하는 사람은 없게 될 것이다. 문제는 필요를 넘어서 탐욕을 채우려는 데에서 생긴다. 탐욕은 끝이 없는 것으로 자연과 이웃을 착취하여 모든 것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현대 물질문명의 맹점은 바로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키려는 데에 있다. 탐욕은 채워야 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이다.



물질적인 소유의 한계를 필요로 줄인다면 우리들 활동의 많은 부분이 줄어들게 되고 많은 시간이 남게 된다. 현대인 모두가 눈코 뜰새없이 바쁜 이유는 자신의 물질적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뛰어다니기 때문이다. 필요한 만큼의 물질 소유로 만족하고 남은 시간은 정신적인 풍요를 누리는 데 사용해야 한다. 풍요한 정신적인 차원과 관련되어서 쓰여져야 하는 개념이다. 정신적인 풍요를 누리기 위하여 인격수양, 기도, 명상 등을 실천해야 하며 이것들이 행복의 기준, 인간 평가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탐욕을 필요로 전환시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관을 바꾸는 일로 종교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도 가난을 복음삼덕의 하나로 여기면서 풍요시하여 왔다. 가난에 대한 해석을 시대와 장소에 따라 유연하게 혹은 엄격하게 해 왔지만 가장 정확한 해석은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필요한 만큼의 소유란 어느 만큼이냐하는 문제가 남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함께 살기 위해서도 나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물질은 필요한 만큼, 정신은 풍요롭게' 누리는 삶을 하느님 나라에서 삶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동양에서는 가난하지만 도(道)를 즐기는 삶(安貧樂道)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