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문제와 공동선


















저자: M. 롱우드

흔히들 1970년대를 일러 생태학의 연대가 되리라고 한다. '환경의 위기'라는 오늘의 우리네 무거운 짐을 지고 나가기 위하여 이 기간 동안에 광범한 분야에 걸쳐 일치된 협력이 이루어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멸종의 길에 내려서고 말 것이라는 것이 비단 텔레비젼과 주간지 등 매스 미디어 뿐 아니라 더욱 난삽한 전문 기사에도 울려퍼지고 있는 경종이다. 오늘의 아모스들은 생명의 생태학적 현실이 어둡다고, 인간의 생존이 지구상의 생태체계를 이루는 생물학적 과정의 복잡한 조직망에 완전히 매이어 있다고, 인간은 현대 공업기술로서 도리어 생태학적으로는 파괴적인 일들을 행하고 있고 그래서 인간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마저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생태학'이라는 말은 듣기에 식상할 정도로 인구에 회자도는 일상어가 되어 버렸는가 하면(심지어 추하게 잇속이나 차리는 저속한 상품선전에도 이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사람들은 도리어 그 참뜻을 생태학이란 어떤 유기체를 관찰하되 그 환경 전체와 관련해서 곧 이종 및 동종의 다른 유기체와 관련해서 보는 것임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열손가락으로 모자라는 수의 갖가지 제목을 단 서적들이 생태학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식자들의 단체들이 이 문제에 분과를 할애하고 있다. 생태학 운동에 앞장선 사람들 가운데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 좌익 인사도 우익 인사도, 착실한 가정주부도 오염 회사의 싹싹한 외무사원도, 끈질긴 고참들도, '기형적 생태'의 신출나기들도 있다. "모두가 환경의 구제를 원하고 있으나 아무도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 "필자는 성격이나 경력 어느 면으로도 환경 말세론의 예언자 노릇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이런 일은 에를리히, 하아딘 기타 제씨들이 텔레비젼 심야방송 석상에서 그들의 신탁을 발설하면서 잘들 수행하고 있으니, 필자는 다만 '환경의 위기'에 관하여 그리스도교 윤리학자로서 밝힐 만한 몇가지 면을 논의하는 보다 온건한 일에 그치기로 한다.

그리스도교 윤리학은 구스타프슨이 지적한 바에 의하여 적어도 네가지 기본 요점에서 출발할 수가 있다. ①상황분석 ②기초신학의 명제 ③도덕 원리, 혹은 ④그리스도 안에 사는 크리스찬 생활의 성격 및 도덕 행위에 있어서의 그 올바른 표현이 그것이다 어떤 특수한 도덕적 판단 내지 결정의 출발점으로서 이 네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하든, 구스타프슨의 주장에 의하면, 그 판단 내지 결정은 그것이 건전한 것인 한 다른 세가지 요점으로 옮아가는 법이다. 근자에 생태학 문제를 논하는 신학자들의 저서는 구스타프슨의 제2의 기본 요점, 곧 기초신학의 명제에서 출발하는 또 이를 가장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신학 고유의 관점에서 쓴 저술이든 혹은 신학적 윤리학의 관점에서 쓴 저서들이든 그 저서들은 시틀러가 쓴 세계 교회 협의회 제3차 총회에서 제기한 문제, 곧 "구속의 힘이 역사를 전개한다는 것을 충분히 긍정할 만한 가톨릭 신학을 수립하는 것은 가능한가?" 에 대하여 긍정적인 대답을 시도해 왔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중요하다. '자연'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계에 대하여 어떤 기본자세를 가지게 되느냐, 또 세계 안에서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하며 목적을 성취할 것이냐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가 다른 기본 요점을 선택하는 까닭은 분명한 신학적 내지 교리적 입장에서 환경문제의 논의를 시작하는 이들을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기본 요점, 곧 환경 문제에 관련해서 우리의 행동을 해석하고 지도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윤리 체계 내지도독 원리들을 강조하는 일이 '환경의 위기'에 관한 근자의 논의에 있어서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해 왔기 때문이다. 아래의 고찰에서 필자가 선택한 기본 출발점에서 다른 세가지 기본 요점으로 옮아갈 때 이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변화가 일어날 때 이를 의식하고는 있을 것이다.

I. 집합 원리와 분배 원리

도덕원리를 논함에 있어서 배리를 따라 '집합'원리와 '분배'원리를 구분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집합원리-공공이익, 공동이익, 공공선, 일반복지, 공동선 따위-는 당해 단체 내지 공동체 전체의 사회적 선익에 관한 것이요, 분배 원리-정의, 공정, 형평, 기회균등 따위-는 당해 단체 내지 공동체의 구성원 사이에 어떤 '재화'를 혹은 '부담'이 분배되어야 할 방식에 관한 것이다. 예컨대 국내 자산의 보다 공평한 분재를 기한다거나 각 시민에게 상당한 주택과 소득과 직업을 마련해 준다는 것이 관심사라면 이를 실행하는 데 필요한 개혁의 도덕적 정당성은 정의, 평등, 기회균등 따위의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분배 원리에 의존할 것이다. 한편, 인구증가의 추세를 방지 또는 역전시킨다거나 과잉 생산 기술의 개발, 사용을 억제한다거나 살인적인 무기 생산 조직의 만연을 제지한다거나 하는 것이 관심사라면, 이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한다는 것은 공공이익, 공동이익, 공동선 따위의 몇가지의 집합 원리를 적용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정치 도의의 이 두가지 면은 쉽사리, 조화, 공존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둘 사이에는 매우 자주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최근 브루클린의 루터파 목사 노이하우스는 생태학 운동을 일컬어 가난한 이들의 정당한 요구에 대한 음험한 반동이라고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노이하우스는 아이슬리의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가 "늘 자욱한 스모그에 덮여 있는 도시들"과 수질에는 관심이 있어도 그 도시 안에 살아야 하는 가난한 이들, 상당한 주택이나 평등한 직업 선택권이 없고 교육의 기회나 정당한 참정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혹평하고 있다. 그가 인용하는 "인종 차별의 사회 안에서 깨끗한 공기를 마시려는 자 누구냐?"하는 경구는 집합 원리와 분배 원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갈등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깨끗한 공기가 사회내의 누구에게나 좋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인종 차별은 사회 전체를 모질게 좀먹는 암이며, 여기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사회 협동의 소산인 권리 내지 이익의 분배에 있어서의 불평등이다.

분배 원리에 입각하여 환경 오염의 반도덕성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균형을 잃은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염의 악영향이라는 부담의 대부분이 오염자들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그들의 동의를 받지도 않은 채 계속 지워진다는 것은 과연 부당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집합 원리를 적용하면 사회 전체에 미치는 환경 악화의 해독을 더욱 효과적으로 말할 수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분배적 사고와 집합적 사고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선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어느 관심사에 우선권을 부여해야 하느냐를 우리가 미리 말할 수는 없다. 서로 연관된 가치 체계들 사이의 올바른 균형은 추상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의 최종적인 판단기준으로서의 어떤 최종적인 궁극 원리에 호소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원리의 비중은 구체적, 역사적 상황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가령 인구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침실의 내밀을 지키고 피임법을 선택할 부부의 권리와 부부에게 허용되는 자녀 출산의 수를 제한할 사회의 권리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을 해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출생률을 저하시키는 방법으로 '자유낙태' 정책을 채택하게 되면 태어나서 살 태아의 권리가(태아는 한 인간 개체로서의 지위가 있으며 자궁 안의 생물학적 물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고)인구 증가의 억제라는 예정된 사회의 선익과 충돌하게 된다. 어떤 형태의 통제 행정으로 옮아가는 데서 발생하는 개인 자유의 상실은 체계적, 장기적인 자원운용 계획을 마련할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중요시되지 않을 수 없다. 공기와 물의 오염을 방지하는 엄격한 규제에 대하여 완전한 복종이 보장되기위해서는 필경 경찰 국가식에 가까운 통제 방식이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위의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개인의 권리라는 의미에서의 분배 원리의 요구와 공공이익 내지 공동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합 원리의 요구 사이의 갈등이 있다.

미국의 개신교 윤리학자들, 특히 니이버에 의하여 크게 형성된 '정치적 현실주의'전통의 계승자들은 주로 정의, 평등 따위의 분배 원리적 비판기준의 정립, 적용에 관심을 기울여 왔고 공동선 따위의 집합 원리적 비판기준에 대해서는 별로 깊이 또 널리 생각한 바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개신교내에, 예컨대 지상의 풍부한 자원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문제를 다루는 대소책자들은 많이 있으나, 부의 생산에 관련된 가치들에 관하여 우선적으로 쓴 책자는 매우 드물다. 요컨대 이들은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각자가 생산된 재화에 대하여 정당한 몫을 차지하는 일이며 인간의 충족될 줄 모르는 소유욕은 이를 고려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 같다. 이에 비하여 교황의 회칙들은 현세의 재화 생산을 인류의 공동선을 위하여 중요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큰 지혜를 보여 주고 있다.

II. 자유주의의 빈곤

집합 원리에 대하여 개신교 윤리학자들의 주의가 부족한 가장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아마 니이버와 그를 따르는 '정치적 현실주의'전통 전체의 사상에 계속 깃들어 있는 자유주의 이념의 영향이라 할 것이다. 자유주의를 특징짓는 기본 정치사회관은 이 전통의 고전적 대표자인 록크와 밀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니이버의 정치학 저술들을 익히 아는 이들은 필자가 여기서 자유주의의 특징으로 약술하는 바와 니이버의 사상 사이에 현저한 유사성이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상의 전개 방식과 강조점에 있어서으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결국 록크와 밀의 정치사회관은 근본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록크의 경우, 사람들은 "생명의 자유와 재산의 상호 '보존'을 위하여 '사회계약'으로 결속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기본 선익을 록크는 '소유'라는 일반 개념으로 요약하고 있다. 한편 밀은 사회가 보호해야 할 자유을 길게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결국은 그 모두를 아래와 같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러 마땅한 유일한 자유는 우리가 타인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타인의 노력을 방해하게 되지 아니하는 한에서 우리 자신의 선익을 자기 나름으로 추구하는 그러한 자유이다. 록크에게 있어서나 밀에게 있어서나 필경 중요한 것은 정치 사회의 정당성 여부가 개인의 자유라는 개념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이다. 사회 활동의 한계도 목적도 개인의 자유롭고 구애 없는 발전이라는 수립 보장되어야 할 유일한 목적 내지 가치에 의하여 결정된다. 여기서 하나의 전체로서의 공동체로서의 정치사회는 별로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정치사회는 각기 정부의 세력과 사회 협동의 소산을 획득하고자 투쟁하는 이익 단체들의 하나의 복합체이다. 자유주의가 제시하는 정치와 정책 형성의 이론을 윌프는 '벡터 합계' 또는 '공정 거래'의 이론이라고 불렀다. 이 이론에 의하면 정부 공직의 대표자들은 전국의 각종 이익 단체들이 행사하는 압력의 초점이다. 이익은 혹은 간접적으로 정당을 통하여, 혹은 직접적으로 의회나 그 밖의 덜 공식적인 영향력 수단들을 통하여 표현된다. 통치과정에서 나타나는 법률과 정책은 선출된 공식자들에게 수임된 세력 관계의 변화에 의하여 형성된다.

요컨대 '정치적 현실주의'는 이 전통과 더불어 사회 도덕 문제를 거의 전적으로 분배 문제로만 보고 있다. 정치란 권력과 정책 결정을 통제하기 위한 이익단체들간의 투쟁으로 개념되고, 사회 문제란 사회의 자원을 어떤 단체는 너무 많이 차지하고 어떤 단체는 너무 적게 차지하는 그런 경우로 간주된다. 도덕적 관심사의 초점은 대립하는 이익 단체들간에 하나의 조잡한 '형평'내지'세력 균형'을 성취하는 일이다. 여기서 새로운 정책의 제안은 자기 이익을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단체내에서 발생하게 마련이고 그 정책은 불균형을 시정하는 수단으로 표방되는 것이 특징이다.

정치의 이 '현실주의적인'면이 중요하다는 것, 더우기 필요하기조차 하다는 것은 또 여러 가톨릭 정치 이론가들의 저술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하는 바를 찾아보아야 허사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 기술 사회의 여러 사회 문제를 다루는 데에 충분한 기초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문제들 가운데는 부당한 자원 분배와는 상관없는 문제가 많이 있다. 이런 것들은 단체들간의 세력 균형이나 자산 평균화로 해결될 수가 없다.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이 정치사회관으로써는 적절히 이해 혹은 취급할 수 없는 문제들 가운데 특별히 두드러진 것이 바로 '환경'에 관한 문제들이다. 우리의 공기, 특히 대도시의 공기는 더러워져 가고 있다. 심지어 암을 유발할 가능성조차 있다. 우리의 식수는 거의 전국 어디서나 갈수록 부족해지고 있고 마시기 어려운 물이 되어 가고 있다. 대륙을 누비는 아스팔트나 콩크리트도로가, 어디를 가나 눈에 뜨이는 간판과 네온의 정글이 전국의 땅을 , 공동체의 이웃관계를, 남은 녹지대를 점점 좀먹어 가고 있다. 우리의 도시들은 부패해 가고 있다. 우리의 공립하교 체재는 전국적으로 저질화하고 있다. 패커트의 '폐물 제조자들'에 멋지게 기술되어 있듯이, 어디서나 계획적인 폐물화 작업에 대한 거부 반응이 측적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이 나라의 서민들이 부유해져가고 있는 동안에, 또 사회내의 그들의 상대적인 경제 수준에 상관없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이다.

깨끗한 공기와 물이란, 사회의 이웃관계와 녹지대란, 훌륭한 공공 교육 체제란, 끈질긴 수공업 생산이란 전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회 단체에만 속하는 그런 '이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은 세력 균형을 적용함으로써 혹은 기존 단체들에 대하여 사회의 자원을 재분재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환경문제의 대두는 특히 미국 도시 사회에서는 백인보다 흑인에게, 부자보다 가난한 이들에게더 많은 해를 끼치는 경향이 있고 이런 의미에서 불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들은 사회 전체의 문제이지 어떤 특정 단체의 문제가 아니다. 이익단체 본위의 자유주의에 있어서는 이들 '집합 원리적인' 문제들이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들은 분배 문제가 아니고 나아가 개인 '이익'의 혼합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동선에 관한 문제다. 이들을 취급하기 위해서는 여러 단체들이 경제, 종교, 인종, 지리상으로 중복되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 필요가 있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단체들을 보다 크고 보다 완전한, 서로 다른 여러 단체들을 내포하고 있으나 단지 그 총합에 그치는 것은 아닌, 바로 인간 공동체내에 존재하는 그러한 단체로 보는 일이다. 환경문제와 같은 관심사는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주는 문제요, 이런 문제에 관하여 사회적 결정을 행함에는 엄숙한 윤리적 숙고와 집단의 공동결정의 필요성이 존재한다. 정치사회는 단지 자유, 평화, 질서, 분배, 정의 따위의 바람직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현세적 형태로든 종교적 형태로든 일반적으로 자유주의는 이렇게 보는 경향이 있다. 정치 사회는 요컨대, 하나의 행동력의 구현이다. 함께 공동 생활을 반성하고 함께 공동선을 위하여 행동하는 그러한 인간 존재와 희망과 관심사의 표현이다. 정치사회는 규범적으로 볼 때 하나의 '공동체'로 개념될 필요가 있다.

위에서 약술한 자유주의적 정치사회관과는 대조적으로 필자가 역설하고자 하는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및 그를 따르는 토미즘 전통대로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날 때 부터 사회적 존재이며 인간의 참 존재가 곧 인간의 본질이 인간 공동체에 속할 것을 필연적로 요구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곡을 찔러 지적하기를 인간 공동체 밖에 살겠다는 사람은 여느 인간보다 낮은 자이거나 아니면 높은 자-곧 동물이 아니면 천사라고 했다. 이 견해를 따르면 인간의 인격은 대소간의 공동체에 그 중요한 일원으로서 결속되어 있고, 또 이런 관계로 해서 인격의 발전 형성과 계속적인 기능이 실현되고 의미를 발견한다. 가족, 교회, 국가 또 그밖의 제도의 일원임으로 해서 한 인간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또 영적으로 존립하는 것이며, 동시에 공동생활 고유의 책임과 의무에 의하여 부과되는 한계의 제약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 공동체가 인간 각자의 인격에 악마적, 파괴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나날이 압제적인 조직과 제도에 직면하고 있는 빈민굴의 흑인이나 보호 지역의 인디언들에게 조직과 제도의 적극적, 후원적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은 허황된 일이다.

그리스도교 윤리학은 어떤 실천 계획에 있어서나 근본적인 사회개혁의 가능성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공동체내에 발생하는 인간성의 부패와 타락과 왜곡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인간들 가운데 작용하는 신의 자애로운 섭리와 구속 사업을 이해함에 있어서 인간 공동체에 대하여 응분의 존엄성을 부여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제도와 법률과 정책은 비단죄와 악을 억제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선과 복지를 위해서도 주어진 신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인간의 자기 나름으로 삶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공동체의 삶에 참여함으로써만 삶의 성취를 발견한다는 것,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삶을 희생하는 거기서 진정한 인간성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통찰이다.

III. 윤리 체계로서의 공동선

위에서 필자는 고전적인 자유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이라고 유별하여 지칭한 사상 사이에 정치 사회를 개념하는 데 있어서 서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거니와, 이를 우리의 관심사의 초점인 도덕원리와 관련해서 보면 각 전통이 강조하는 원리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차이는 비단 자유주의 전통에는 '분배 원리적 사고'가 우세한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에서는 '집합 원리적 사고'가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부각된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집한 원리적 비판기준이 자유주의 전통 안에서 정립될 때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안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그것은 개인적으로든 단체적으로든 인간이 모색하는 '선'을 우선적으로 언급하는 반면에, 자유주의 전통의 그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이익'을 우선적으로 언급한다. 이것은 어의 상의 구별 이상의 뜻이 있는 것으로서, 정치 사회에 대한 이해의 차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지금은 '이익'이라는 관념이 정치와 도덕을 논함에 있어서 예사스런 것이 되어 있지만, 실상 이것은 비교적 근래에 일어난 하나의 혁신이다. '이익' 은 개인주의적, 주관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선'이라는 개념과 연결된 일은 별로 없다. 적어도 윤리학설에 있어서는 매우 최근까지도 찾아 볼 수 없던 일이다. 사실 이것은 '이익'을 '선'에 대치하여 놓고 이를 정치 활동의 목적을 서술 규정하는 근본 개념으로 삼는 17,8세기의 근대 공리주의가 일어나면서 주관적, 개인적 이익이 정치의 제일 목적으로 간주되기에 ㅣ르고나서의 일인 것이다. 개인의 이익은 '욕망'이라는 개인이 독특하게 의식하고 개인이 가장 훌륭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그것으로 개념되기에 이르렀다. 공동체의 '이익'은 단지 거기에 속한 각자의 개인적인 이익의 혼합 내지 총계에 지나지 않게 되었가. 이것은 '선'이라는 한 인간 또는 공동체의 건전한 기능과 전체적인 복지를 시사하고 내포하는 개념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익'과 '선'의 구별은 더욱 자세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이 구별은 어떠한 목적이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느냐를 평가함에 있어서의 '주관적'인 태도와 '객관적'인 그것의 구별이다. '이익'은 주관적인 평가에 매우 역점을 두는 반면에 '선'은 그러한 결정을 하기 위한 보다 객관적인 기초를 제시한다. 이 대조가 약간 달리 표현되는 것으로 배리의 구별이 있다. 그 하나는 '필요존중' 즉 "해당되는 필요를 그대로 추궁하는"원리다. 또 하나는 '이상 존중'의 원리로서, 여기서는 "필요가 문제되는 개인의 우선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떤 필요의 충족을 어떤 다른 그것보다 우위에 둔다" '이상 존중'의 원리는 이와같이 '필요 존중'의 원리와 대조된다. 베리가 '이상 존중'의 원리를 워낙 '원리'라고 부르기조차 옳지 않을 만큰 "괴퍅하고 변덕스럽고 허황한" 것이라고 매도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의 유익한 이 구분까지 배척할 필요는 없다. 이 구별의 중요성은 이익단체적 자유주의의 저술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이익'개념과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공동선' 개념과를 비교함으로써 분명히 드러날 수 있다.

1. 공동이익

이것은 내가 검토하고자 하는 세 가지 집합 원리적 개념 가운데 가장 개인주의적이고 주관적이다. 이것은 서로 다른 개인이나 단체들이 공동의 목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으나 이 목표를 보는 관점은 그 개인과 단체의 고유한 이익에 따라 각기 다르다고 주장한다. '갑'이라는 정책 대신에 '을'이라는 정책을 채택하는 데 있어서 두 개인 혹은 단체가 공동이익을 가질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이들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 공동이익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상 공동이익을 고려한 까닭은 오히려 흔히는 한 단체내의 구성원들 사이에 또는 서로 다른 단체들 사이에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식별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가령 세탁하는 입법을 방지하는 데에 공동이익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환경의 위기 문제가 여러 저자들, 특히 세계 종말을 운운하는 자들이 지적하듯이 '모두가'생존하는 문제에 관한 것뿐이라면, 공동이익은 적절히 적용할 만한 비판기준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존 이상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인간다운'공동체로서 생존하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적용하는 비판기준 내지 가치는 생존이라는 이 최소한의 관심사 이상의 것을 포괄하고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2. 공공이익

이 개념의 관심사는 사람들이 공민의 일원으로서 가지는 이익에 있다. 이것은 '공공의'이익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공동이익보다는 어느 정도 개인주의적 성격이 덜하다. 공공이익은 단지 개별적으로 우연히 이익이 일치하는 사람들의 공동으로 주장하는 그런 목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공동이익'의 반대말이 '개별의식'이라면, '공공이익'의 반대말은 '특수이익'이다. 공공이익의 관점에 있어서도 여전히 개인적 이익이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사람들이 공민의 일원으로서 참여하는 어떤 이익이 있고, 이것은 특수이익 단체의 일원으로서의 이익과 상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령 오염의 효과가 현저하게 형평에 반하는 곧, 오염을 유별하는 측과 그 피해를 입는 측 사이에 불공평이 있는 경우의 사례들은 어떤이들이 이를 정의라는 원리에 의하여 논하려 하는 것과는 달리, 공공이익과 오염자들의 특수이익의 상충이라는 점에서 취급할 수 있다할 것이다.

3. 공동선

필자가 이미 시사한 바 '이상 존중'의 사고는 이 개념으로 구체화된다. 위의 두 가지 '이익'개념과는 달리, 이 개념은 한 인간 내지 공동체의 건전한 기능 또는 복지를 촉진 내지 수반할 활동이나 정책을 시사하고 있다. "'갑'이 인간 A에게 유익한다"는 것은 '갑'이 A의 생존, 성장 내지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생활의 생태학적 현실을 고려해서 정부의 정책을 재정비하고 도시계획과 교육제도를 수립하고 소비성향을 변화시키고 하는 일은 공동선을 적용함으로써 적절히 정당화된다 할 것이다. 이런 일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착수한 정책들은, 다원론적, 정치적 거래로 자기들의 '필요' 내지 '이익'을 표현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허용되어서는 아담스미스의 말마따나 자비로운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서 사사로운 이익들이 충돌에서부터 공동선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 한,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환경 문제를 평가하는 윤리 체계로서의 공동선 개념을 논함에 있어서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로마 가톨릭 전통의 일부에 사실 그런 경향이 있듯이, 공동선이 분배적, 집합적 요구를 모두 포함하는 총괄적인 목적이라고 보자는 것은 아니다. 공동선의 초점은 어떤 특수한 종류의 대상을 집합 원리적으로 고찰하는데 있다

따라서 이를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에 고려해야 할 집합 원리 '자체'로 보는 것까지도 올바른 일이 못된다. 때로는 이미 논한 다른 집합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경우도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인류 멸망을 예방하기 위한 핵무기의 통제는 전혀 별개의 정치 세력의 공동이익에 호소함으로써 가장 설득력 있게 주장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경 문제를 다룰 때에는 공동선 개념이 특별히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우리 생활의 복잡한 존재양상, 그러니까 각 부분 모두가 통일된 전체의 성질을 지탱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복잡미묘한 균형체계 속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공동선을 개념하는 데 있어서는 생활 공동체로서의 생물계 전체가 포괄되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인간 생활의 질과 건전성은 생물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다른 생명들의 생활의 질과 건전성에 완전히 매여 있기 때문이다. 필경 생태학이란 단 한가지의 생태학이 있을 뿐, 인간 생태학과 인간 이하의 생물의 생태학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환경의 위기를 똑바로 직시할 때, 우리는 우리가 이미 이루어 놓은 생활 체계가 손상된 것을 회복하기 위하여 막대한 전문적인 자료가 필요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자와 공업 전문가들은 비단 해박한 지식뿐 아니라 풍부한 슬기를 곧 판단력을 갖춘 지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과학과 공업기술이 우리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함께 형성하고 있는 한, 그래서 정치 분야에서 선도자 구실을 하면서 우리의 해결책을 이루어 내어야 하는 한, 우리는 이에 종사하는 실무자들간에 상당한 책임의식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와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일어나는 결과들, 즉 제3세계에 확대되어 가는 공업화, 달리 대안이 없이 증가 일로에 있는 석유와 핵연료의 개발, 세계 도처에 촉진되고 있는 개인 소비성향의 증가, 수확 중대를 위하여 갈수록 화학비료와 농약에 더 의존하게 되는 현상, 이런 현상들은 확실히 기술 분야 문제 이상의, 가치 분야의 문제들이다. 우리가 파울 에룰리히와 아니 불쾌하기조차한 점을 느낀다면 우리 스스로 해야할 과업이 있다. 즉 우리가 동경하고 우리의 현재를 바칠 미래 생활의 생물계 공동체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와 또 그 공동체의 공동선에 대하여 선명한 비젼을 제시하는 일이다.

필자가 이 논문에서 환경의 위기를 현실적으로 대면하기 위한 배경 제시의 수단으로서 시사한 것은, 우리의 행동을 해석하고 지도하는 데 도움이 될 일련의 도덕 원리 내지 그 윤리 체계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의 주장은 자유주의 윤리에 부족점과 결함이 있다는 것,. 특히 자유주의가 환경 문제의 분석에 있어서 거의 배타적으로 분배 원리적인 관심사에만 초점을 두고 사회 전체의 집합 원리적인 관심사를 고려에 넣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이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필자가 제안한 것은 전통적인 공동선 개념에 대한 하나의 수정이요, 이 공동선은 환경에 관련된 문제를 평가하는 하나의 규범 체계로서 공동이익 및 공공이익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그러나 또 구별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