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물시계  


 


     
 조선이 건국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새로운 표준시계가 요청되어, 태조 7년(1398) 5월 종로에 종루(鐘樓)가 세워지고 경루(更漏)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 최초로 제작된 누각인 경루는 고려 말에 사용된 부루(浮漏) 또는 부전(浮箭)과 같은 유입형(流入型) 물시계였을 것이며, 16년 원(元)나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두자성(杜子盛)이나 세운행(洗運行)과 같은 유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물시계에 의하여 사진(司辰)이라는 서운관 관리가 종루에 걸어 놓은 대종(大鐘)을 쳐서 경점(更點)을 알렸다. 당종법(撞鐘法)은 초경(初更)에는 28수(宿)의 수에 따라 28회를 울렸고, 오경(五更)에는 33천(天)에 따라 33회를 울렸는데, 전자를 인경[人定]이라 하여 이 시각에 성문을 닫았으며, 후자를 바라[罷漏]라 하여 성문을 여는 시각으로 삼았다.

세종 6년(1424) 5월에는 경복궁에 청동제 누각(更點의 器)을 중국의 체제를 참고하여 주조하였다. 세종 때에는 이 밖에도 몇 가지 물시계가 제작되었는데, 세종 16년(1434)에 처음으로 자동시보장치를 가진 물시계를 제작하였다.

세종은 이를 위하여 동래현(東萊縣) 관노인 장영실(蔣英實)을 특별히 등용하여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 직책을 주고 중국에 파견하여 물시계를 연구하게 하였고, 장영실은 천문학자 김빈과 함께 2년여의 노력 끝에 세종 16년(1434) 6월에 자동시보 물시계를 완성하였다. 자격루(自擊漏)라고 하는 이 자동시보 물시계는 경복궁 남쪽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어, 그해 7월 1일을 기하여 경루를 대체(代替)하고 새로운 표준시계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자격루는 부정시제(不定時制)인 당시의 야루법(夜漏法)에 맞게 경점(更點)을 자동으로 시보하도록 정밀하게 설계되었고, 그 기능은 귀신과 같아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하였다 한다. 수수호(受水壺)의 길이가 11자 2치, 지름이 1자 8치나 되는 거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격루는 창설된 지 21년 만인 단종 3년(1455) 2월 사용이 중지되고 보루각도 폐지되었는데, 이는 장영실이 죽고 공동설계자인 김빈도 그해 10월에 운명할 정도로 고령이어서 고장난 부분을 고칠 수 없었던 것이 원인인 것 같다. 자격루는 그후 14년 만인 예종 1년(1469) 복원되었다가 연산군 11년(1505) 창경궁으로 이전되었다.

그후, 새로운 자격루가 중종 31년(1536) 제조되었는데 그 구조는 장영실의 자격루와 같은 것이었고, 점수(點宿)를 스스로 칠 뿐 아니라 인경과 바라도 울릴 수 있는 것이었다. 한편, 세종의 총애로 대호군(大護軍)까지 오른 장영실은 세종을 위하여 천상시계(天象時計)며, 자동물시계인 옥루(玉漏)를 만들어 바쳤다. 그것은 세종 20년(1438) 1월에 완성되어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설치하였다.

옥루는 수격식(水激式) 동력장치를 가진 일종의 자동 천상물시계라 할 수 있는데, 명종 초 경복궁 화재로 없어진 것을 명종 9년(1554)에 다시 만들었다. 그 밖에 조선시대의 누각에는 의기(器)라는 일종의 물시계가 있는데, 이 시계에는 농가사시(農家四時)의 광경이 새겨 있어 계절에 따른 농사진행 상황을 한눈으로 볼 수 있었다 한다.

또한, 세종 19년(1437) 6월에는 휴대용 물시계인 행루(行漏)가 여러 개 완성되어 함길도와 평안도의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과 변경(邊境)의 각 군(郡)으로 보내졌다.

현재 덕수궁에 보존되어 있는 누각은 중종 때 만든 자격루로, 효종 4년(1653) 시헌력(時憲曆)의 시행에 따라 1일 96각(刻)으로 바뀌자 자격장치를 그대로 쓸 수 없어, 그것을 제거하고 누기(漏器)만으로 조선 말까지 누국(漏局)에서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