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조선술과 해외 활동  


 



     
 삼국시대의 백제는 지리 위치의 특수함 때문에 중국과의 해상교통 왕래가 빈번하여, 일찍이 남조의 <宋書> 이만전에 <백제국전>이 열거되어 있고, 여기에 백제왕이 宋의 소제 경평 2년에 장사인 장성을 보내어 "대궐에 입궐하여 조공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백제 지역 내에 대소의 강들이 서로 교차하고 있고 또 한강, 금강, 예성강 등의 강들이 바다로 나가기 때문에 배를 만드는 조선의 역사가 오래 되었고, 조선 사업이 발달하여 일본 열도상의 모든 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 연해 도시들과의 해상교통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때문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무왕 10년(A.D.609)에 "승려 도흔과 혜미를 위시한 10명과 속세인 75명이 해로를 택하여 오국의 강남에 구법하러"간 일을 기록하였다. 아울러 일본의 전지천황이 안예국에 '백제선박' 2척의 건조를 명령한 것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의 광명황후가 견당대사에게 하사한 어제가가 후세에 전해오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큰 배에 노가 있고, 너를 당나라 땅에 보낼 것이다. 해상에서 신의 많은 보호가 있기를 축원한다." 이것은 일본이 3세기부터 신라와 백제의 조선기술을 활용한 것을 설명한 것이다.

백제의 원양항해 사업은 백제의 승려 겸익이 배를 타고 인도까지 불법을 구하러간 사적 중에서부터 구체적 증명을 얻을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 성왕 4년에 승려 겸익이 불경을 구하러 뜻을 세워 항해하여 인도에 가서 범문을 5년 동안 배워 인도의 언어에 통달하고, 불경의 깊이를 연구하고 계율을 잘 지며 후에 인도승려 와 함께 백제로 돌아왔다.
비록 이것이 신빙성이 없는 것은 백제의 선박으로 원양하여 인도에까지 갔다는 기록이지만, 그러나 백제 승려가 본국의 해상사업 방면의 발전에 중국의 법현고승과 같은 공헌을 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 물과 한국인의 삶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