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의 해상경영  


 

     
 장보고는 신라 무주 완도 사람이며 777년에 태어났다. 30세(870)에 정년과 신라에서 바다를 건너 하남도 밀주를 거쳐 해주에서 육로로 서주에 이르렀다. 장보고는 당나라 문종 대화2년(828년) 이전 쯤에 신라로 돌아가서 오래지 않아 벼락 출세를 하였다.

<중국통사·당나라와 사방의 여러 제후국> 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장보고는 귀국한 뒤 왕에게 보고하기를 "전(全) 중국 땅에 모두 신라 노비가 깔려 있으니 저를 청해 완도에 진을 치고 지키게 해주시면 사람을 노략질하는 적도들이 바다로 못나가게 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신라 경휘왕은 만명을 주어 청해를 지키게 하니 당나라 대화 연간(827∼835) 이후로는 해상의 신라인 매매가 근절되었다. 그러므로 장보고와 정년은 신라 백성을 보호하고 사사로운 감정을 버려 힘을 합하여 인신매매를 금지하였으며 해로의 안녕을 보장하였으니 신라의 영웅이 됨에 부끄러움이 없다.」

당나라 중서사인인 두목은 장보고와 정년을 위하여 전기를 지으려고 하였는데 장보고는 정년이 곤궁할 때 기탁해 왔는데도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성으로 그를 대하여 "음식으로 극진히 환대하고", "병사 오천을 나누어 정년에게 주고", 반란을 평정하여" 김우징을 맞아들여 왕위에 즉위시켰으니 이가 곧 신무왕이 된" 사실을 찬양하려는 데 그 뜻이 있었다.
장보고의 위업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조선통사> 통일신라 1장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신라 봉건왕조 정부는 대외무역의 진일보된 발전을 추진하기 위하여, 상인들의 신변안전과 해로의 소통을 위하여 언승왕 17년(828) 청해진을 설치하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였다. 장보고는 본래 청해진의 일개 평민이었으나 대내외 무역에 종사한 뒤로는 점차로 해상무역 대권을 장악하였다. 동시에 정치상으로도 큰 권력을 장악하여 청해진에 해상무역 중심지를 건설하고 매우 강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청해진은 당나라 일본과의 무역에서 매우 큰 작용을 하였다.

이것으로 장보고가 통일신라시대의 해상경영사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그리고 지워질 수 없는 공헌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