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치수사업  


 

     
 우리 나라는 계절풍의 영향으로 다우 지역에 속하며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米作 농업을 일찍부터 발달시켰다. 따라서 물관리의 중점은 농업용수의 개발이었으며 기록상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축조된 저수지는 벽골제이다. 벽골제는 삼국사기에 신라가 축조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서기 330년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삼국의 대립하고 있던 때이므로 백제의 축조로 보는 것이 사학계의 지배적인 견해로 되어 있다. 삼국시대에 축조되었다고 알려진 저수지로는 김제의 벽골제를 비롯하여 눌제, 황등제, 실제, 제천의 의림지, 대제지, 밀양의 소산제 공검지 영천의 청제등이 있다. 6세기 중반부터 8세기말까지의 시기에는 수리관계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시기는 3국이 영토 확장을 위해 서로 다투었고 고구려와 백제가 나·당 연합세력에 의해 멸망하고 이어 통일신라가 당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투쟁하던 시기이다. 이 사실은 국가의 집권적 통치력과 수리건업의 상관관계를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수리사업은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수리사업의 성쇠는 집권적 통치력의 강약과 비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의 수리시설은 골짜기 물이 평지로 흘러나오는 산곡의 입구에 제방을 쌓거나 못이나 늪에 제방을 쌓는 형태가 주종을 이루었다. 좁은 개울물을 끌어들여 관개수로 활용했을 터이지만 후대의 방천 혹은 洑와 같이 하천을 다스려서 관개수로 적극 활용하는 방식은 일반화되지 않았다. 하천의 수면과 경지의 높이에 차이가 있어 물을 끌어쓰는데 기술적인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510년(무녕왕 10년) 춘정월에 제방을 튼튼히 쌓도록 명하고 또 내외 유식자를 모아서 농사에 종사하도록 했고, 신라는 531년 봄 3월에 유사에게 제방수리를 명하였다. 810년 봄 2월에는 왕이 신궁에 친히 제사하고 사신을 보내어 국내 제방을 보수케 하였고, 859년 여름 4월에도 제방을 보수케하고 권농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본기>에는 축제 또는 수리에 관한 기사는 7조밖에 없다. 이것을 근거로 신라의 수리사업을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재수법에 비추어 본다면 결코 적은 기록이라고는 할 수 없다. 대체로 신라는 5~6세기 때부터 수리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시기는 이춘녕 씨의 주장처럼 신라에서 벼농사가 급속히 발전하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