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수운과 해상활동  


 

     
 한·중·일 삼국의 노력으로 중국의 한무제 시대부터 남조까지 근700년 동안에 공동으로 한·중·일 삼국의 해상통로를 여는 하나의 통로를 관통시켰지만, 그러나 자주 고구려의 저지를 받았고 이 사실이 중국의 조정에서 발행하는 책에도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남조 이만전(A.D. 478)에서 말하기를, "고구려가 무도해서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가서, 매번 지체되어 좋은 바람을 타지 못해서, 비록 조공할 길은 있으나 통할 수도 통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실로 도적 때문에 중국가는 길이 막힌 것을 원통해 한다."
다시 북조 백제국전을 예로 들면, "여경왕이 처음 사절을 보내 말하기를 신이 동쪽에서 나라를 세웠으나 이리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아 비록 대대로 은덕을 받았으나 저희들 뜻대로 조공을 하지 못했습니다." 라 하였다.

고구려가 해상통로를 저지시킨 주목적은 영토확장 외에 한·중·일의 해상교통을 독점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이익을 독점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는 고구려 수군의 실력이 막강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그 때문에 수와 당은 몇 차례나 헛되이 오래 끄는 해전을 일으켰으나 번번이 패퇴당하였다.

양제기의 기록에 "A.D. 612년 정월 양광이 수륙양군 113만 3천8백여 명을 이끌고 두 갈래로 나누어 고구려를 공격하고, 그 때 군인 및 징용된 사람들이 길을 메워 주야로 끊이지 않았다." "창해도군이 천리를 항해하는 데 돛을 높이 올려 빨리 가니 큰 군함이 나는 것 같이 패강을 횡당하여 평야에 도착했다." 수는 그해 7월에 성과없이 돌아왔다.

태종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A.D. 645년 2월 이세민이 수륙 양군을 이끌고 장량을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강·오·경·락 등지에서 모집한 9만 5천명과 배 500척을 거느리고 래주를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향했다."이적을 요동 행군총관에 임명하여 천하의 병사 10만을 모집하여 아울러 평양으로 향하게 하여 고구려를 토벌케 하였다." 당나라 수군도 수나라 군대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저항에 부딪쳐 같은해 9월 성과없이 퇴각하였다. 당 고종은 A.D. 666∼668에 다시 곽대봉을 보내 해군을 바로 평양으로 공격할 것을 명하고 설인귀로 하여금 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평양에서 만나도록 하여 마침내 고구려를 멸망케 하였다." 이토록 고구려의 해상 저지력과 연달은 육해전의 승리는 고구려의 해상활동사에 금자탑이라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