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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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타모니카에서 가장 힙하다는 백화점 프레드 시걸에 들렀을 때 그곳에서 아주 재미있는 기계를 발견했다. 맞춤 립글로스를 만들어 준다는 이 기계는 단돈 20달러만 내면 3분 안에 나만의 립글로스를 만들어 준다.


과정은 이렇다. 먼저 생일 케이크 맛이나 풍선껌 맛 등 재미난 이름의 향과 맛 중 원하는 것을 선택한 후 컬러를 선택한다. 그런 다음 펄 이나글로스 질감 역시 원하는 만큼 섞어 기계 안에 넣으면 3분 만에 막 구운 빵처럼 따끈한 나만의 립글로스가 만들어져 나온다. ‘imx’라고 이름 붙여진 이 립글로스 회사는 이후 1년간 내가 만든 립글로스 샘플을 간직해 재오더할 수 있도록 사후 서비스도 철저했다. 에디터뿐 아니라 동행한 다른 매체의 뷰티 에디터도 앞다퉈 하나씩 만들었다.
 





매달 넘쳐나도록 많은 립스틱이나 립글로스를 사용해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뷰티 에디터들이 브랜드도 잘 모르는 립글로스 하나에 왜 그렇게 열광했을까. 그것은 분명‘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립글로스’기 때문일 것. 요즘같이 기성(旣成)이 만연하는 시대, 내 취향에 맞는 단 하나뿐인 내 것을 갖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사실 오늘날과 같이 화장품이 대량 생산되기 전, 화장품이나 향수는 큰 사치품으로 여겨져 귀족이나 돈 많은 부유층 여성 외에는 감히 사용할 수 없었다. 파티 드레스처럼 주문에 의해 만들어지는, 즉 커스텀 메이드 코즈메틱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샤넬은 자신만의 붉은 립스틱과 핑크 컬러 립스틱을 특별 주문해서 사용했습니다. 그 컬러는 코코 레드와 코코 핑크로 불렸고 지금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샤넬 메이크업 크리에이터 도미니크 몽크투아의 설명처럼 가브리엘 샤넬은 자신만의 립스틱을 만들어 사용한 것은 물론 자신이 사용하기 위한 향수도 주문을 해서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전설적인 샤넬 N°5다. N°5는 조향사가 샤넬의 요구대로 만들어 가지고 온 향수 중 5번째 향수를 선택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정도. 헬레나 루빈스타인과 에스티로더 역시 처음에는 자신이 사용하고 싶은 제품을 스스로 주문하거나 만들어 사용했다.




산업 혁명이 일어나고, 모든 생활 용품을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면서 화장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귀족이 아닌 일반 여성에게는 화장품의 공업화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화장품 가격은 떨어졌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에 수만 개의 코코 핑크가 만들어지고, 이 립스틱을 나도 사용하고 내 친구도 사용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섭섭하다. 패션 하우스의 경우 프레타 포르테가 막강해졌지만 여전히 오트 쿠튀르는 건재하다. 양장점이라는 맞춤집은 찾아볼 수 있건만, 커스텀 메이드 코즈메틱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몇몇 향수 하우스는 면면히 쿠튀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주문 제작 향수 회사인 ‘크리드’는 1760년대부터 지금까지 주문에 의한 향수를 만들고 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프랑스의 유제니아 황후에서 다이애너비까지 크리드는 왕실의 가족과 셀리브리티의 향수를 제조했다. 크리드사에 향수를 의뢰하고 싶으면 먼저 크리드사의 6대 마스터 퍼퓨머인 올리비에 크리드와 두세 차례 면담을 해야 한다.

그가 만든 커스텀 메이드 향수는 1년에 15개로 한정되고, 주문한 향은 고객에게 5년 동안 독점권이 주어지며, 5년 후에는 전세계 크리드 향수 전문점에서 다른 향수와 함께 판매된다. 이렇게 자신만의 특별한 향수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10리터기준 최소 3만 달러(약 3천6백만원) 정도.
 








 ‘아닉 꾸딸’ 역시 쿠튀르 퍼퓨머리로 출발했고, 지금도 그 정신을 이어간다. 그렇지만 크리드와 달리 1년 중 몇몇 특별한 날을 정해 맞춤 향수를 제작하고 있다. VIP 고객의 개인 기념일에 고객의 향 선호 테스트를 거쳐 커스텀 메이드 향수를 제조한다. 특히 향수 보틀로 명품 크리스털 ‘바카라(Baccarat)’ 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및 연말에 전세계 약 1백 명의 고객을 선정해 유명 화가가 직접 그린 보틀에 개인 맞춤 향을 담아준다. 이 경우 향수는 재판매가 되지 않으므로 영구히 나만의 향을 가질 수 있다.





프랑스의 ‘바이 테리’는 커스텀 메이드 메이크업 브랜드라고 한다. 이브 생 로랑에서 14년간 인터내셔널 메이크업 디렉터로 일한 테리 드 긴즈베르에 의해 탄생된 이 브랜드는 프레타 포르테와 오트 쿠튀르의 두 가지 차별화된 라인을 지니고 있다. 오트 쿠튀르는 이름 그대로 맞춤 라인으로 파운데이션·파우더·립스틱 3가지 품목만을 맞춤 서비스한다. 제품이 나오는 데는 1개월 정도 걸린다. 재미있는 것은 별도의 패키지 없이 원하는 보틀에 담아준다는 점. 립스틱 하나에 1천4백 유로(약 2백10만원, 1년치 사용 기준)를 받는다.


미국의 대표적인 커스텀 메이드 브랜드는 ‘프레스크립티브’다. 보통 커스텀 메이드 브랜드가 살롱 형태의 매장에서 극소수의 고객을 상대로 영업하는 데 반해 프레스크립티브는 백화점에 입점되어 있을 정도로 매장이 많다. 바이 테리와 마찬가지로 프레스크립티브 역시 파운데이션과 페이스 파우더 2품목만 주문제로 생산한다. 팩토리를 갖춘 매장에서 카운슬링 후 제품이 나오기까지 1시간 정도 걸리는 초고속 시스템을 자랑한다. 만약 팩토리를 갖추고 있지 않은 매장이라면 2주 정도 소요된다. 가격은 일반 라인보다 두 배 정도 비싸 파운데이션과 파우더가 10만원대.
 






이런 외국에 비해 국내에서는 커스텀 메이드 브랜드를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최근 보다 고급화되고 차별화된 제품을 원하는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는 커스텀 메이드 브랜드가 등장하고 있다.




 커스텀 브랜드 제품은 기성 제품에 비해 최소 두 배에서 수십 배의 가격이 책정된다. 그 과정이나 수요, 인건비를 고려해보면 비싸다고만 할 수는 없다. 혹 비용상 나만의 화장품을 가질 수 없더라도 실망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다. 팔레트와 각종 립스틱만 있으면 스스로 쿠튀르 메이크업을 제조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유명하다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스스로 믹스한 메이크업 제품이 들어 있는 지저분한 팔레트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지저분한 팔레트야말로 진정한 오트 쿠튀르의 정수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