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비통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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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사회에서 여행이 많은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 중심에 서게 되리라는 걸 일찌감치 직감한 루이비통은 150년 전 자신의 이름을 딴 여행용 트렁크 회사를 설립했다. 당대에 가장 멋스럽고 부유한 고객을 위한 물건만을 정교한 수작업으로 만들어냈던 루이비통은 시작부터 고급 패션 비즈니스의 중심에 있었다.

파리의 최고급 여행 가방 제조자로 출발한 루이비통은 두 세기를 넘기며 명성 있는 고객과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아 거대한 패션 하우스로 성장했다. 1997년 영입된 마트 제이콥스는 이 거대한 왕국을 이끄는 새로운 핵심이 되었고, 150년 전통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창조적인 재해석 작업은 매해 루이비통 하우스에 새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1821년 프랑스 동부 시골에서 태어난 가난한 루이비통은 일을 찾기 위해 14세에 걸어서 파리까지 가게 된다.

파리에서 그는 마들레인 인근에 있는 포장용 상자 제조자인 장인 무슈 마레샬의 견습공이 되었다. 루이비통이 한 일은 세련되고 부유한 부인들을 위한 세면용품 케이스를 만드는 일을 했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폴레옹 3세 부인의 여행 짐을 싸는 일을 하게 된다. 그때 처음으로 특수한 여행 가방을 주문받아 만들게 된다.





회사 설립의 첫 해. 현재의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뱅돔 광장 부근 뇌브 데 카푸신가 4번지에 첫 번째 매장을 열다. 그당시 루이비통은 이미 파리의 상류층 사이에 인기 있는 트렁크 메이커였고 회사 창립 첫 해 결혼하여 안정된 가정을 이루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트렁크 윗부분이 둥근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루이비통은 포플러 나무 몸체와 철제 프레임, 방수 처리된 트리아농 쥐색 캔버스, 메달 장식으로 견고한 플랫 트렁크를 선보였다.
 






 

트렁크 주문이 많아져 작업실을 파리 외곽의 아니에르로 옮기다. 아니에르는 센 강변에 인접해 있고 특히 철도역인 생라자르역 근처에 위치해 교통의 요지였다.

대성공을 한 쥐색 트리아농 캔버스 모조품이 빠르게 유통되자 그는 베이지와 갈색 스트라이프 캔버스로 덧씌운 트렁크를 출시했다.





현재까지도 특별 주문 상품을 제작하는 작업실(①)과 박물관(②)으로 이용되고 있는
아니에르의 아틀리에  





파리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에 5만2천2백 명의 출품자 가운데 동메달을 획득하다. 그러나 3년후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과 파리 혁명 정부의 격변으로 인해 회사가 파산 직전의 위기를 맞다.



위기를 딪고 매장을 스크리브가 1번지로 옮기다. 그곳은 엘리트 여행자들이 자주 묵는 그랑 호텔 건너편에 위치하며 본래 경마클럽의 마구 제조 작업장이었던 곳이었다.

이때 가족의 보금자리를 작업장이 있던 아니에르로 옮기고 역마차를 이용해 완성된 트렁크를 시내의 매장으로 운반했다.
 

트렁크 운반용 역마차  





       ① 과거의 아니에르 작업장의 전경                          ② 작업장 앞의 일가  





 

트렁크를 열면 한쪽에는 옷걸이가 달려 있고 다른 한쪽에는 서랍이 달려 있는 의상 트렁크(wardrobe trunk) 개발.

이것은 옷장처럼 내부가 설계되어 여행가가 여행지를 옮겨다닐 때마다 번거롭게 가방을 풀지 않아도 되도록 하여 그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 현재까지도 주문 생산되고 있는 의상 트렁크





16세부터 아니에르 작업실에서 견습을 시작한 루이비통 2세 조르주 루이비통이 21세의 나이로 매장 경영을 물려 받게 된다. 조르주는 영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영국과 유럽에 사는 상류층 남성들의 테이스트를 잘 알고 있었다.

이 시절 다양한 용도의 여행 가방이 주문 제작되었는데 기구 타는 사람을 위한 에어로 트렁크, 모자를 담을 수 있는 쇼페르 백, 아프리카 탐험가인 사보르냔 드 브라자를 위한 트렁크 베드, 사업가나 문필가들에게 인기를 얻었던 세크레테르 트렁크 등을 줄줄이 선보였다.  

2세인 조르주 루이비통
(1857~1936)  




아프리카 탐험가 사보르냔 드 브라자를 위해 고안된 트렁크 베드  





영국의 가방 제조업체들과 치열한 경쟁에 직면하게 된 젊은 후계자 조르주 루이비통은 아버지를 부추겨 런던의 심장부인 옥스포드가에 파리에 이어 두 번째 매장을 열다.



스트라이프 캔버스 복제품이 너무 많아져 체커보드 모티프의 바둑판 무늬 다미에 캔버스를 도입하다. 그리고 불법 복제를 막기 위해 캔버스 위에 등록 상표라는 시그니처를 찍었다.



 

다미에 트렁크에 달았던 특별한 숫자로 이루어진 5개의 회전식 안전 자물쇠가 특허를 받게 되었고 고객들은 각각 개별적인 비밀 번호를 부여받았다.

←초장기 루이비통 여행 트렁크에 달려있는 자물쇠들





조르주 루이비통에 의해 미국 진출. 뚜렌느 여객선으로 미국 뉴욕에 도착한 조르주 루이비통은 시카고 무역 박람회에 참석했고, 미국의 주요 백화점 소유주였던 존 워나메이커와의 계약으로 뉴욕과 필라델피아에서 트렁크가 판매되기 시작. 미국서도 그의 트렁크는 인기리에 판매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캔버스인 모노그램 출시. 루이비통의 이니셜과 세련되게 다듬어진 별과 꽃 무늬 패턴이 들어간 이 모티프는 세계적인 상표로 등록되었고, 수많은 모조품으로부터 루이비통의 독창성을 지켜내는 시금석이 되었다.



또한 자동차광인 조르주 루이비통은 ‘제1회 파리-루앙 레이스’에서 영감을 받아 자동차용 트렁크를 고안하여 1897년 열린 자동차 쇼에서 최초로 선보였다. 자동차용 트렁크 중 일부는 옐로, 블루, 레드, 블랙 등 단색으로 코팅된 캔버스 비토니토로 마감 처리. 비토니토의 컬러들은 1986년 에피 가죽 컬러로 리바이벌되었다.